9월 초 새누리당 A 의원이 안철수 의원을 국회 의원회관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다. 안 의원의 얼굴이 어찌나 밝던지 A 의원은 “무슨 좋은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안 의원은 진지하게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정치를 조금 해보니 이제 감(感)을 잡았습니다.” ‘정치 속성 과외’를 끝낸 안 의원이 13일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했다. ‘안철수의 새 정치’는 또다시 둥지를 떠나 ‘미지의 혁신’을 쫓아 날아갔다. 그가 어떤 정치적 감을 잡았는지는 도무지 감이 오지 않는다.
같은 달 22일 새정치연합 지도부는 문재인 대표의 자택에서 만찬 회동을 열었다. 박주선 의원이 탈당한 날이다. 참석자들은 문 대표를 중심으로 통합과 혁신의 길로 나아가자고 의기투합했다. 이때 올해 최고의 건배사가 등장한다. 이종걸 원내대표는 “폭풍으로 향하는 선장 문재인 대표의 만수무강을 위하여!”라고 외쳤다. 최근 당무 거부로 문 대표를 폭풍 속으로 몰아넣은 바로 그분이다. 공부와 아부는 틈틈이 해야 한다지만 이 원내대표가 문 대표의 만수무강을 빌지는 몰랐다.
이 원내대표의 유머감각은 남다르다. 여야가 지난달 29일 쟁점법안을 놓고 막판 마라톤협상을 벌일 때다. 새누리당 원유철 원내대표가 이 원내대표와 악수하며 농담을 던졌다. “요즘 이 원내대표 손을 우리 집사람 손보다 더 많이 잡는 것 같아요.” 이때 이 원내대표가 놀라운 애드리브를 구사한다. “집사람하고도 손을 잡아요?”
누구보다 큰 웃음을 준 이는 새누리당 홍문종 의원이다. 10월 초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장인 홍 의원이 국정감사 도중 조는 모습이 언론 카메라에 잡혔다. 다음 날 홍 의원은 자신의 블로그에 이런 글을 남겼다. ‘잠자는 사진은 여야 간 치열한 공방으로 난감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동원한 고도의 할리우드 액션이었다. 상임위원장은 졸지 않는다. 다만 조는 척할 뿐이다.’
홍 의원의 ‘할리우드 액션’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지난달 ‘반기문 대통령, 친박(친박근혜) 총리론’을 들고 나왔다. 그러자 같은 편인 친박계가 앞장서서 홍 의원을 난타했다. 히든카드를 너무 일찍 보여준 탓일까, 아니면 홍 의원만 친박계의 전략 수정을 몰랐던 것일까. 이후 그는 침묵했지만 이렇게 강변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내 말은 틀리지 않다. 다만 틀린 척할 뿐이다.’
새누리당 유승민 전 원내대표의 퇴진 사태는 헌정사에 길이 남을 ‘블랙코미디’였다. 대통령이 여당 원내대표를 찍어내는 초유의 사태 앞에서 새누리당은 갈가리 찢겼다. 유 전 원내대표 편에 선 이들은 ‘배신자’의 멍에를 썼다. 그의 퇴진에 앞장선 이들은 “악역을 맡을지언정 ‘꼬붕’ 노릇은 하지 말라”는 동료 의원들의 핀잔을 들어야 했다. 분란의 중심에 선 유 전 원내대표가 최근 모범적인 의원에게 주는 ‘백봉신사상’ 대상을 수상하자 “청와대가 백봉신사상을 국정화하기로 했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공포를 유머로 승화하려는 여의도의 처절한 몸부림이 짠할 뿐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배신의 정치’에 이어 ‘진실한 사람들’로 진화하며 편 가름의 중심에 섰다. 원박(원조 친박) 신박(새로운 친박) 진박(진짜 친박) 가박(가짜 친박) 곁박(곁불만 쬐는 친박) 용박(박 대통령을 이용하는 친박) 수박(수틀린 친박) 잘박(잘린 친박) 쫓박(쫓겨난 친박) 누박(박 대통령에게 누가 되는 친박)…. 국정 역사 교과서에 앞서 ‘친박용어사전’부터 편찬해야 할 지경이다. 한 사람과의 관계가 정치인의 모든 걸 규정하는 현실이야말로 2015년 대한민국의 ‘웃픈(웃기고 슬픈)’ 자화상이다.
여유와 배려가 사라진 살벌한 정치에서 소소한 웃음을 준 이들에게 감사해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정치가 이렇게 비루해질 수는 없다. 하상욱 시인은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이런 글을 올렸다. ‘열애설 같은 중요한 문제가 터지면 정치뉴스 같은 가십거리로 국민의 시선을 돌려보려 한다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인간은 ‘모든 것이 한순간에 바뀔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평생 모든 것이 똑같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사이에 갇혀 있다고 한다. 정치권을 보면 후자의 두려움이 밀려온다. 2016년 ‘병신년(丙申年)’을 맞아 정치권을 향해 더 많은 욕설이 쏟아진들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닐까 봐 그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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