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 위한 직무개발 비용 줄일 임금개편 준비된 기업 절반뿐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2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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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황속 찾아온 정년연장]<中>직무-임금체계 개편 ‘발등의 불’

KB국민은행 일부 영업점은 지점장이 2명이다. 둘 중 한 명의 명함에는 ‘선임 지점장’이란 직함이 써 있다. 지점장을 끝낸 뒤 55세에 임금피크제 적용을 받아 남은 사람이다. 그의 주 업무는 영업점 직원들의 업무를 보조하는 것이다. 월급은 임금피크제에 들어가기 직전의 절반 수준이다. 국민은행은 임금피크제에 들어간 직원들에게 줄 만한 직함이 없어 올해 5월 선임 지점장 제도를 도입했다. 선임 지점장 A 씨는 “말이 선임이지 어린 직원들을 도와 서류 정리를 하다 보면 아직 팔팔한데 뒷방 늙은이로 쫓겨난 것 같아 속상하기도 하다”며 “정년이 늘어 계속 일할 수 있는 건 고맙지만 30년간 은행에서 일하면서 쌓은 노하우도 살리고 보람도 느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보름 뒤인 내년 1월 1일부터 300인 이상 사업장의 정년이 60세로 연장되지만 상당수 기업은 노조 반발 등으로 임금체계 개편 등 제대로 된 준비를 하지 못했다. 정년연장이 안착되려면 호봉제 중심의 임금체계가 직무성과급 중심으로 바뀌어야 하고 고령자에게 알맞은 직무도 개발돼야 한다. 하지만 이런 준비를 한 기업은 전체의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

대한상공회의소가 3월 국내 300개 기업을 대상으로 ‘정년 60세 시대 대비 현황’을 조사한 결과 53.3%가 “정년 60세에 대한 대비가 미흡하다”고 답했다.

기업들은 근무연수에 따라 연봉이 올라가는 연공형 임금체계를 직무, 성과급 중심으로 바꿔야 하지만 노조의 반대에 부딪혀 손을 쓰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최영기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 상임위원은 “고령 근로자들이 실제 60세 정년까지 다니기 위해서는 직무개발과 직급체계 조정이 필수”라며 “나이 든 직원이 어린 상사 밑에서 일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 준비 안된 기업들 한숨만… 호봉제 임금부터 손봐야 ▼

○ 연공형 임금체계 바꿔야

전문가들은 정년연장이 안착하기 위해서는 임금체계 개편이 우선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정년이 연장되면 고령자의 고용 기간이 늘어나는 만큼 기업의 인건비 부담이 늘어난다. 한국경제연구원은 정년이 연장되는 내년부터 2020년까지 5년간 기업들의 인건비 부담이 총 107조 원 증가할 것으로 추정했다.

특히 근속연수가 길어질수록 월급이 오르는 연공형 임금체계는 정년연장으로 인한 인건비 부담을 더욱 가중시킨다. 한국에서는 여전히 임금에서 호봉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2013년 말 현재 상용근로자 100명 이상 사업장의 전체 임금에서 호봉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71.9%에 이른다.

기업들은 연공형 임금체계를 성과중심으로 개편하기 위해 직무급이나 성과급 비중을 늘리려 하지만 노조는 “직원들 간의 불평등을 야기한다”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한 정유화학업체 관계자는 “하는 일이 다르면 급여도 달라질 수 있어야 한다”며 “하지만 근속연수가 같은데 월급 수준이 다르다는 걸 직원들이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지 않아 임금체계를 바꾸지 못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권순원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요즘 기업들이 정년연장과 함께 도입하는 임금피크제는 과도기적 제도에 불과하다”며 “직무급을 도입하고 성과급 비중을 높이는 등 임금체계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정년연장 제도가 자리 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

○ 고령 직원들에게 맞는 일자리 만들어야

금융감독원에는 ‘연구위원’이라는 직책이 있다. 국장까지 맡고 난 뒤 퇴직을 앞둔 직원들이 주로 연구위원으로 일한다. 이미 부서장까지 지낸 베테랑들인 만큼 부서별로 배치돼 업무 자문에 응하는 역할이지만 실제로 이런 역할을 하는 연구위원은 많지 않다. 소속 부서 후배들과 일하기보다는 외부에서 금융교육 강의를 하거나 신입직원 연수 강의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연구위원들이 모여 일하는 사무실도 금감원 옆 건물에 따로 마련돼 있다. 금감원의 한 직원은 “국장까지 한 사람이 후배 밑에서 일하기가 쉽겠느냐”며 “말 그대로 ‘연구’나 하면서 정년을 기다리는 자리로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정년연장의 필수조건으로 고령 직원들에게 적합한 직무 개발을 꼽는다. 고령 직원에게 맞는 일자리를 줘야 직원들도 불만이 적고 회사도 수익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회사들은 고령 직원들을 ‘쉬는 자리’ 쯤으로 인식되는 한직에 배치한다.

한 금융공기업의 인사담당자는 “고령 직원들에게 적합한 직무를 찾기가 여의치 않다”며 “지방 사무소에 발령 내는 것 말고는 딱히 적합한 자리를 찾기 어렵다”라고 털어놨다. 한 시중은행 인사담당자는 “예전처럼 똑같이 일하기는 힘들어서 싫고, 영업점 업무 지원을 하자니 자존심이 상하고, 내부통제나 감사 업무는 후배 직원들에게 따돌림을 당할까 봐 기피하는 고령 직원이 많다”고 말했다.

생산직의 경우 오래 일한 만큼 업무 숙련도가 높아 고령자도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무직에 대해서는 은행이 적합한 직무를 개발하기가 쉽지 않다. 철강업체인 A사 관계자는 “생산직 직원들은 기술이라도 있어 정년연장의 혜택을 받지만 대체 직원을 찾기가 쉬운 사무직은 관행적으로 직급정년이 되면 나간다”고 말했다.

직무 개발뿐 아니라 연공서열 중심의 인사제도를 바꾸는 것도 필요하다. 삼성생명은 내년 3월부터 ‘사원―대리―과장―차장―부장’ 등 5단계 직급체계를 ‘사원―선임―책임―수석’ 등 4단계로 줄이기로 했다. 근속연수에 따른 직급이 아니라 맡은 일에 따라 유연하게 직급을 부여하겠다는 것이다. 삼성생명 관계자는 “지금은 일정 기간 내에 승진을 못 하는 직원들은 계약직으로 전환하거나 희망퇴직을 하는 게 관례”라며 “직무체계가 바뀌면 승진을 못 해도 자신들에게 맞는 업무를 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후배 상사 익숙해져야

정년연장이 정착되려면 ‘입사 후배’나 나이가 젊은 상사 밑에서 일하기 꺼리는 한국 직장인들의 의식도 바뀌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카드사 직원은 최근 인사에서 부서장 승진 대상이었지만 스스로 승진하지 않겠다는 뜻을 상사에게 전했다. 그는 “정년까지 한참 남았는데 일찍 승진해 봐야 나중에 후배 밑에서 일하는 것밖에 더 있겠느냐”며 “차라리 천천히 가는 게 맘 편할 것 같다”고 털어놨다. 한 시중은행 인사담당자는 “은행원들은 특히 나이 많은 사람이 후배의 부하로 있는 걸 껄끄러워 하는 문화가 강하다”면서 “특히 관리자급은 임금피크제 적용을 받으면 직무 권한이 많이 줄기 때문에 상대적 박탈감이 커서 차라리 희망퇴직을 선택하는 직원이 많다”고 말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일부 기업은 정년연장을 앞두고 수평적인 조직문화를 만들기 위해 선후배들이 서로 ‘∼님’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호칭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씨티은행은 지난해부터 모든 직급 대신 ‘님’으로 상대방을 부르고 있다. 일선 창구 직원도 은행장에게 ‘박진회 님’이라고 한다. 씨티은행 관계자는 “호칭을 바꾸면서 예전보다 직원들 간에 수평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해졌다”고 말했다.

황수경 KDI 선임연구위원은 “특히 금융권의 경우 인사에서 밀려 조사역이나 심사역 등의 자리에 보내지면 이를 견디지 못해 정년을 채우기 전에 나가는 경우가 많다”며 “이제는 근로자들도 성과중심 체계에서는 나이와 상관없이 선배도 유능한 후배 밑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신민기 minki@donga.com·박민우·김준일 기자
#직무개발#정년연장#임금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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