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위있는 죽음, 우린 언제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2월 26일 03시 00분


‘웰다잉법’ 무산위기 환자-가족 고통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두렵기만 한 보편적 진리다. 더이상 치료가 어렵다고 통보받았을 때 밀려오는 절망, 허무, 공포 앞에서 품위 있는 죽음을 생각할 여유는 없다. 그래도 가장 바라는 한 가지는 차가운 병실에서 헛되이 사라지지 않는 것. ‘웰다잉법’이라고 불리는 ‘호스피스·완화의료와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의 법제화가 필요한 이유다. 반복되는 수술과 항암 치료 사이에서 고통스럽게 삶을 마감하고 싶지 않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췌장암 말기 진단을 받고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한 김범진(가명) 씨. 키 170cm에 몸무게 70kg이었던 건장한 중년 남성의 몸은 45kg으로 말라붙었다. 힘겹게 붙어있는 살가죽 아래로 푸른 핏줄이 더 선명해 보였다. 부인 최현희(가명) 씨는 힘없이 누워 있는 남편 옆에서 연신 “말랐어요. 너무 말랐어요…”라며 애를 태웠다.

더이상 치료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남편이 가장 먼저 한 말은 “절망 속에서 삶을 마감하고 싶지 않다. 설령 의식이 없어졌을 때 하루라도 더 살게 하려고 절대 애쓰지 마라. 사느라 힘들어 못 한 여행 다니고 사진 찍으며 가족과 함께 있다가 눈감고 싶다”였다. 최 씨는 “2012년 11월 처음이자 마지막 수술을 받은 이후 애 아빠는 줄곧 가족과 시간을 함께 보냈다”고 말했다.

최씨의 가장 큰 고민은 남편의 마지막. 남편은 연명 치료를 분명히 거부하고 있다. 하지만 병원에서 의식을 잃을 경우 연명 치료를 중단할 법적 근거가 없다. 1997년 ‘보라매병원 사건’ 때 가족의 뜻을 받아들여 의식 없는 말기 환자 연명의료를 중단한 의료진은 살인방조죄로 처벌받았다. 이후 병원에서는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멈추지 않고 있다. 고통만 완화하러 병원에 왔다가 의식을 잃는 날에는 본인과 가족의 뜻과 상관없이 무의미한 연명 치료를 계속 받다가 세상을 떠날 가능성이 크다. 김 씨 뜻대로 하면 가족과 의료진이 죄인이 되고, 뜻대로 하지 않으면 김 씨가 불행해진다. 법이 그렇다.

정답 없는 두 가지 선택지를 두고 고민하던 말기 환자 가족들의 고통이 잠시 줄어드는 듯 했다. 18대 국회부터 소관 상임위원회 문턱을 넘지 못했던 웰다잉법이 9일 보건복지위원회를 통과한 것이다. 이 법안은 연명 치료 대신 통증 완화, 상담 치료를 제공하는 호스피스 서비스를 암 환자뿐 아니라 각종 질병 말기 환자로 확대 적용하고 연명의료에 대한 환자 개인의 결정권을 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연명 치료와 존엄사의 법적 근거가 마련된 셈이다.

하지만 법안을 법제화할 수 있는 법제사법위원회가 21일 최저임금법 개정안을 두고 벌어진 여야 정쟁으로 파행되면서 웰다잉법 연내 법제화가 무산될 위기에 놓였다. 말기 환자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길지 않다. 정치권이 특정 법안을 두고 이견을 보이는 사이 최 씨는 범법자가 될 수도, 남편을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게 됐다.

윤영호 서울대 의대 교수는 “수술, 방사선 치료 등 적극적 치료(cure)가 아닌 돌봄(care)을 택해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누리기 위해 애쓰는 가족들에게 이 법이 절실하다”며 “삶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바라는 말기 환자들을 위해 연내에 법안이 통과돼야 한다”고 말했다.

박성진 기자 psjin@donga.com
#웰다잉법#국회#법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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