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올해 남은 날도 오늘과 내일 이틀뿐. 이즈음이면 너나없이 오고가는 것에 대한 상념이 남다르다. 여행 취재를 전문으로 하는 나는 가끔 이런 짓궂은 질문을 던진다. 떠나는 사람과 남는 사람 중에 어느 편이 되고 싶은지. 순전히 내 직업에서 비롯된 질문이다. 난 늘 떠나는 쪽이었다. 직업상 여행을 밥 먹듯 해야 했기에. 그러다보니 남는 것보다는 떠나는 것에 익숙하다.
그런데 아내는 정반대다. 출장으로 자주 집을 비우는 남편 때문에 늘 남겨졌다. 나는 떠날 때마다 아내에게 미안함을 떨칠 수 없다. 남는 자가 떠나는 자보다 더 힘들다는 것을 알아서다. 떠나는 사람에겐 찾아갈 목적지가 있다. 그러니 뒤를 돌아볼 겨를이 없다. 반면 남는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떠난 이의 빈자리를 돌봐야 하고 돌아오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나는 내 질문에 답을 못하는 사람에게 늘 이렇게 주문한다. 남겨지지 말고 떠나는 사람이 되라고.
그런데 이번 연말만큼은 나도 남겨졌다. 그러면서 14일 타계한 한 분을 떠올린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이다. 이 말에 고인과 나의 친분이 무척 두터웠을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전혀 그렇지 않다. 평생 단 한 번 만난 게 전부다. 대학 신입생 환영행사에서 선배로 등단해 멋진 응원 솜씨를 보여주는 걸 먼발치에서 본 적도 있고, 기자가 되어 신문사 선후배 사이에 뒤섞여 인사를 나눈 적은 있지만 만났다고 말할 수는 없다.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은 2011년 여름이었다. 동아일보에 게재된 내 칼럼을 읽고 만나자고 연락을 해 와서다.
칼럼은 ‘울릉도 그리고 대통령’이란 제목의 글이었다. ‘이제껏 대한민국 대통령 중에 울릉도를 찾은 이가 한 사람도 없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울릉도와 독도 방문을 공표한 일본 자민당의 돌출 행동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던 우리 정부에 심기일전을 주문한 것이었다. 그 이야기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울릉도 방문을 배경으로 전개됐다. 사실 그때까지 그는 울릉도를 방문한 유일한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울릉도 방문 당시는 5·16군사정변 직후여서 대통령이 아니라 ‘국가재건회의 최고의장’ 자격이었다.
박 의장의 1962년 울릉도 방문은 전격적이었다. 울릉도 출신 한 공무원의 자조가 계기가 됐다. ‘이렇게 내팽개쳐 둘 거라면 차라리 일본에 팔아버리시지요’라는. 박 의장의 울릉도행은 비밀리에 진행됐다. 포항에서 해병대 상륙훈련 참관 후 해군함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울릉도로 가는 도중 선상에서 소동이 벌어졌다. 기자 한 사람이 몰래 탄 것이 발각된 것이었다.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이만섭 씨였다. 그때 울릉도까지는 포항서 목선으로 스무 시간 걸렸다. 그러니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 그래서 이 기자는 자연스럽게 박 의장의 울릉도 방문에 동행하게 됐다.
고인이 나를 만나려 했던 이유. 내게 당시 상황을 좀더 정확하게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당시 상황을 소상하게 설명하고 그 내용이 기록된 책도 한 권 건넸다. 언론인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한 인생여정을 적은 자서전이었다.
그 칼럼 이후 울릉도에선 몇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1년 후인 2012년 7월, 당시 박 의장이 숙박했던 옛 군수의 관사에 ‘고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그 한 달 후엔 이명박 대통령이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독도를 방문했다.
이 전 대통령의 독도 방문 9일 전. 고인은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본 의원의 울릉도 방문은 어떤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 대통령 스스로 울릉도와 독도를 방문해야 한다’고. 여덟 번의 국회의원, 두 번의 국회의장에 ‘여당 안의 야당’을 자임하며 의회주의자로 올곧게 처신해온 노(老)정치인. 타계 직전엔 국회와 정치인의 작태를 보면 정치 원로로서 부끄럽다며 외출할 때 선글라스를 쓸 만큼 자신에게도 엄격한 선비였다.
이제 그는 떠났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꼬장꼬장한 그 모습도, 확신으로 가득 찼던 그 목소리도 이제 더는 보고 들을 수 없다. 그로 인해 우리는 남겨졌다. 난마처럼 얽히고설킨 현실 때문에 그의 빈자리가 더 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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