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 조간신문에 집권 4년 차에 접어든 대통령이 ‘세계 일류국가 건설의 꿈을 나누며’라는 제목으로 신년사를 내놨다. 4월 총선과 이듬해 대선을 앞두고 실시된 국민의식조사에서는 “국내 정치 전반에 대한 심한 염증 내지 불신이 나타나고, 기존 정당과 기성 정치인들에 대한 지지율이 매우 낮다”는 결과가 나왔다. 1여(與) 2야(野)의 정계 새판 짜기, 여당 주도 세대교체가 한창이라는 정국 분석이다. ‘한국이 가야 할 길’을 주제로 한 신년 대담은 “산업화-민주화 세력을 통합할 리더십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가 선진국 클럽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해인 1996년 1월 1일 자 동아일보 주요 내용이다. 연도만 2016년으로 바꿔 신문을 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섬뜩할 지경이다. 그때 신문엔 “광복 50주년인 1995년 1인당 국민총생산(GNP) 1만 달러를 넘어섬으로써 이제 선진국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기사도 실려 있었다(이후 수정된 한국은행 통계는 1994년 1만 달러 달성). 그러나 이듬해인 1997년 한국은 외환위기를 맞아 2006년에야 2만 달러 고지를 넘어설 수 있었다. 일본과 독일이 5년 만에 뛰어넘은 3만 달러 소득을 우리는 아직도 넘지 못한 채 10년째 ‘2만 달러의 덫’에 갇혀 있다. 대체 무엇 때문인가. OECD 가입 20년…‘2만 달러’에 갇힌 10년
세계적인 국제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는 동아일보와의 단독 신년 인터뷰에서 미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확산되는 정치·사회적 갈등과 혼란상의 원인을 “정치 리더십에 대한 전례 없는 신뢰 부족 때문”이라고 했다. 기술이 발전하고 사회는 복잡해지고 국민의 기대는 커졌는데 정치 제도와 리더십이 못 따라가고 있다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와 19대 국회는 근 3년을 허송했다. 조직이든 나라든 망조(亡兆)가 들면 먼저 지도세력이 분열하고, 그것을 치유할 시스템마저 붕괴한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1990년대 초∼2013년)을 20년 시차를 두고 따라가는 형국이다.
대통령 리더십부터 달라져야 한다. 세계 주요국의 지도자들을 보라. 미국의 버락 오바마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등 핵심 법안들을 통과시킬 때 소통과 설득의 리더십을 보여줬다. 독일 앙겔라 메르켈도 대연정 협상을 위해 야당 당사로 달려가 17시간이 넘는 밤샘 협상을 마다하지 않았다. 대한민국과 결혼했다는 박 대통령이다. 대통령이 달라져 나라가 달라질 수 있다면 못할 일이 어디 있는가.
무능한 정부, 나쁜 정치는 경제도, 나라도 뒷걸음치게 한다. ‘금수저’와 ‘헬(hell)조선’이 대변하는 기성 정치권에 대한 염증이 마그마처럼 한국 사회 저변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다. 젊은 세대만의 정서가 아니다. 이젠 정말 바뀌어야 한다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시대정신을 알아채지 못하는 집단은 국민 세금으로 편하게 국록을 먹는 ‘공(公)귀족’뿐이다. 호환(虎患) 마마보다 무서운 악정(惡政)은 4월의 총선에서, 내년 12월의 대선에서 주권자인 국민의 벼락같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총선 구도는 ‘기득권 대 반(反)기득권’으로 짜일 가능성이 높다. 20년 전처럼 기득권을 내려놓고 ‘새로운 피’를 수혈한 정당이라야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
다수당이 대선에서 이기려면, 아니 국민의 분노와 고통을 달래려면 경제부터 살려놓아야 한다. 글로벌 컨설팅업체인 매킨지는 박근혜 정부 초기인 2013년 4월 ‘제2차 한국보고서―신(新)성장 공식’에서 “한국 경제는 뜨거워지는 물속의 개구리 같다”고 했다. 지금 한국 경제는 밤샘 공부를 해도 성적이 오르지 않는 고3 수험생 처지다. 몸으로 부딪혀 할 수 있는 제조업에서는 정체 상태인 반면 기초실력이 중요한 의료 관광 같은 고급서비스업과 연구개발(R&D) 분야에서는 좀처럼 중위권을 벗어나지 못한다. 중국의 추격과 일본의 반격에 샌드위치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샌드백 신세다.
1997년 외환위기 때만 해도 글로벌 경제가 호경기여서 허리띠를 졸라매고 수출에 힘쓴 끝에 극복할 수 있었다. 지금은 다르다. 미국이 작년 말 7년간의 제로금리 행진을 멈추고 금리 인상을 시작해 올해 신흥국으로부터의 자금 이탈 등 세계 금융시장이 요동칠 것으로 예상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세계 경제를 지탱해줬던 중국의 동력이 힘을 잃고 있어 우리 경제 전반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 OECD 34개국의 2013년 현재 1인당 국민소득이 평균 4만 달러다. 저출산 고령화라는 ‘인구 폭탄’에 잠재성장률 하락 추세인 우리나라는 단시일 내에 이들을 따라잡지 못할 경우 이대로 ‘장기 저성장의 저주’에 갇힐 공산이 크다.
이 절망적 국면에서 벗어나려면 정치 경제 사회 교육의 판을 바꾸는 근본적인 혁신 말고는 길이 없다. 영국병(病), 네덜란드병도 ‘마(魔)의 1만 달러’ 시절에 성장 지체와 과도한 복지로 인한 재정 악화, 노사 분규, 경제 위기를 겪으며 생겼다. 전투적 노조문화를 고치고 노사정 대타협에 성공한 나라는 선진국으로 갔고, 한국병이 있음에도 OECD 가입에 걸맞은 업그레이드를 하지 못한 한국은 외환위기를 겪어야 했다.
이제 망국적 ‘헬조선병’에 사로잡히지 않으려면 정치 경제 사회 제도 전반의 구조개혁이 필수다. 당장 인기를 얻기 위한 포퓰리즘 정책은 정권이 바뀌면 폭탄으로 돌아온다. 유효기간 지난 수구 이데올로기와도 결별이 필요하다. 이미 선진국은 자국 기업과 손잡고 글로벌 시장을 향해 뛰는 추세다. 반대 세력까지 아우르는 유능한 정치 지도자가 국력을 결집시키고, 기업 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내며, 제조업 혁신과 서비스산업·정보통신기술(ICT) 융합으로 신성장동력을 만들어내지 않고는 선진국은커녕 후진국으로 뒤처져 버릴 것이다.
강대국 간의 힘겨루기로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환경도 녹록지 않다. 러시아에서 중국 인도 일본까지 카리스마에 국수주의로 무장한 마초형 리더십이 다시 각광받고 있다. 집권 5년 차에 들어선 북한 김정은이 작년엔 중국의 압력으로 핵 도발을 자제했지만 올해 미국 대선의 해를 이용한 4차 핵실험으로 핵보유국의 지위를 굳히려 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는 북한의 핵실험 감행에 격분한 중국이 김정은 체제 붕괴에 어떻게 대응할지를 두고 미국과 비밀 회담에 돌입할 수도 있다고 ‘2016년 세계경제대전망’에서 예상했다. 한반도 통일에 대비하는 한미중 공조 조정이야말로 박 대통령이 나서야 할 일이다. 통일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필수 과제다. 경제 발목 잡는 나쁜 정치, 총선에서 심판을
240년 전의 병신년(丙申年)이었던 1776년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나오고 미국이 건국한 그해,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개혁군주 정조가 즉위했다. 이때부터 산업혁명과 시장경제, 민주주의와 근대화의 물결에 올라탄 미국 등 10개 나라는 5만 달러 클럽에 올라섰고, 근대화엔 뒤지지 않았으나 세계대전을 겪은 영국과 독일 등 8개국은 4만 달러 클럽에 머물러 있다. ‘아시아의 영국’을 자부했던 일본은 4만 달러 턱 밑이다.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 한반도에서 새로운 시대로의 대전환을 꾀했던 정조 이후 조선은 개혁을 멈췄고, 우리는 우물 안에 갇혀 있다 국권을 잃어야 했다. 서구 제국이 2세기에 걸쳐 완성한 산업화와 민주화를 압축해 달성한 대한민국이다. 타는 목마름으로 불렀던 민주주의의 과잉이, 민생을 외면한 정치가 지금 국가 발전의 장애 요소가 돼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오늘 새롭게 시작하는 2016년, 정치부터 개혁하고 전진해야 선진국을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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