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25일 오후 7시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동 코트야드 메리어트 호텔. 새누리당 원유철 원내대표가 서둘러 호텔 안으로 들어섰다. 박근혜 대통령이 정한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처리 데드라인이 하루 앞으로 다가온 만큼 마음이 조급했다. 원 원내대표는 새누리당 김정훈 정책위의장,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함께 당시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 이종걸 원내대표와 최재천 정책위의장(지난해 12월 28일 탈당)을 기다렸다.
원 원내대표가 ‘스토커’라는 소리까지 들으며 이 원내대표를 졸졸 쫓아다닌 끝에 겨우 성사시킨 자리였다. 이 원내대표는 언론의 눈에 띄지 않는 ‘은밀한 장소’를 원했다. 멀쩡한 국회 원내대표실을 두고 인근 호텔까지 찾아간 이유다.
약속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이 원내대표는 나타나지 않았다.(이 원내대표는 정치권에서 ‘지각대장’으로 유명하다.) 원 원내대표가 전화를 걸자 이 원내대표는 “국회에서 회의 중이니 다시 국회로 올 수 없겠느냐”고 했다. 여권 인사들은 황당했지만 판을 깰 순 없었다. 원 원내대표는 “다들 기다린다. 빨리 오라”며 전화를 끊었다.
이 원내대표가 도착하고 1시간여 동안 공방이 오갔다. 그렇다고 눈에 쌍심지만 켠 것은 아니다. 감기 기운이 있다는 이 원내대표를 위해 원 원내대표는 수행비서에게 쌍화탕을 사오도록 했다. 최 부총리는 집에서 가장 아끼는 와인을 들고 왔다. ‘지성이면 감천’ 전략이었다. 최재천 전 의장은 한중 FTA 비준동의안이 처리된 뒤 기자들에게 “협상 과정에서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최 부총리의 통 큰 결단이 있었다”고 했는데, 고급 와인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여야 간 공방이 오가던 중 야당이 ‘작전타임’을 외쳤다. 두 사람은 회의실을 나간 뒤 깜깜무소식이었다. 40여 분이 지나 원 원내대표가 이들을 찾아 나섰다. 두 사람은 옆방에서 잠에 취해 있었다. 쌍화탕에 와인까지 곁들였으니 ‘쌍와 폭탄주’ 탓인지도 모른다. 이들을 깨워 늦은 밤까지 협상을 벌였지만 결론을 내지 못했다.
이후 며칠 동안 마라톤협상을 벌인 끝에 비준동의안은 같은 달 30일 통과됐다. 하지만 원 원내대표를 기다리는 것은 ‘황당한 협상’이란 질책이었다. 여당이 야당의 요구를 수용해 매년 1000억 원씩 10년간 1조 원을 마련해 농어촌을 지원하기로 합의한 데 따른 비판이었다.
한 고비를 넘겼지만 박근혜 대통령의 한숨은 줄지 않았다. 이젠 경제활성화 법안과 노동개혁 법안들을 통과시켜야 한다. 하지만 상황은 더 꼬였다. 야당의 탈당 사태로 야당 지도부가 사실상 무너졌다. 2일 원 원내대표는 이 원내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쟁점 법안 협상을 제안했다. 그러자 이 원내대표는 “(야권) 통합의 길을 떠나야 한다”고 답했단다. “국회부터 통합하자”는 원 원내대표의 하소연은 메아리 없는 넋두리일 뿐이다.
이제 여당이 기댈 것은 국회의장의 직권상정밖에 없다. 하지만 요건이 매우 까다롭다. △천재지변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 △교섭단체 대표들의 합의 등 세 가지 경우에만 직권상정이 가능하다. 박 대통령의 한숨 소리가 우렛소리처럼 들리는 원 원내대표는 요즘 별별 상상을 다 한다고 했다.
지난해 12월 22일 전북 익산 근처에서 리히터 규모 3.9의 지진이 나자 귀가 번쩍 뜨였단다. 정의화 의장에게 전화를 걸어 “천재지변이 일어났으니 직권상정을 해 달라”고 읍소하고 싶은 심정이었다는 것이다. 이 원내대표를 붙잡고는 “만약 탈당할 거면 그 전에 법안 합의서에 사인해주고 나가면 안 되겠느냐”고 통사정을 하고 싶단다.
야당의 승낙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국회선진화법’하에서 여당 원내대표는 ‘슈퍼 을(乙)’이 됐다. ‘선진화 실험’은 4년이면 족하다. 그러나 기막히게도 모두가 잘못된 걸 알지만 누구도 바로잡을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이 법을 개정하려면 5분의 3(국회의원 총원 300명 중 180명) 이상이 동의해야 한다. 이제 방법은 세 가지뿐이다. 여야가 결자해지 차원에서 스스로 개정을 하든, 헌법재판소가 위헌 판정을 내리는 것이다. 이것도 어렵다면 국민은 여든, 야든 한 당에 180석을 몰아줘야 한다. 현명한 아이는 회초리를 맞기 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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