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당국이 간첩 혐의 등으로 억류 중인 한국계 미국인 김동철 씨(63)는 지난해 10월 10일 북한 노동당 창건 70주년 기념식에 초청받아 북한에 들어갔다가 체포된 것으로 전해졌다. 김 씨는 또 1930년대 김일성의 목숨을 구해준 한족 중국인 장위화(張蔚華)의 손자와 동업하는 사업가로 확인됐다.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가 김 씨의 이런 배경을 알았다면 인질로 억류되어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12일 김 씨의 집이 있는 중국 지린(吉林) 성 옌지(延吉)의 가족과 소식통 등에 따르면 김 씨는 북한 고위층이 보낸 초청장을 받고 지난해 9월 30일 자신의 승용차를 몰고 훈춘(琿春)을 거쳐 나선에 들어갔다. 부인도 동행했다.
김 씨는 나선에 있는 자신 소유의 두만강호텔에서 북한 고위 인사들에게 전달할 선물을 준비하던 중 갑자기 들이닥친 북한 요원들에 의해 연행됐다. 이후로 소식이 뚝 끊겼다. 이 호텔은 김 씨가 10여 년 전 당시 화폐로 1200만 위안(약 21억6000만 원)의 거액을 들여 지은 4층짜리 건물이다.
그의 연행 사실은 동행했던 김 씨의 부인이 중국의 친지 등에게 연락해 구명 운동을 펼치면서 전해졌다. 옌지의 한 소식통은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김 씨가 1월 1일 전에 풀려날 것이란 소식이 있었으나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가족들은 11일 CNN 보도를 통해 김 씨가 평양에서 억류돼 조사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기 전까지 근황을 전혀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평소 두만강호텔에 머물고 있던 부인 김 씨는 북한 당국의 조사를 받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가족들은 김 씨가 김일성의 생명을 구한 한족 중국인 장위화 가문과 동업을 해왔다고 전했다. 지난해 1월 두 차례 지린 성 푸쑹(撫松)에 있는 장위화의 손자 장치(張琪) 씨를 찾아가는 등 사업을 논의해 왔다는 것이다.
장위화는 1937년 일본 경찰에 붙잡혔으나 함께 활동하던 김일성의 은닉처를 숨기기 위해 사진 현상액을 마시고 24세 나이에 자살했다. 이에 김일성은 자서전 ‘세기와 더불어’에서 한 장(章)을 할애해 ‘혁명의 전우, 장울화(장위화의 한국식 한자음)’를 소개하고 자신의 목숨을 구한 두 명의 외국인 동지 중 한 명이라고 밝혔다. 김정은은 푸쑹에 있는 장위화의 묘에 기일마다 조화를 보내고, 주요 기념일에 장치 씨와 그의 부친 등을 북한으로 초대하는 등 양 집안은 여전히 교류를 이어오고 있다.
옌지의 소식통은 김 씨가 장치 씨와 함께 나선에 요양원을 설립해 운영하는 방안을 논의해 왔다고 전했다. 또 김 씨가 지난해 4월 나선시에 세워진 김일성 김정일 부자 동상 제막식에 장치 씨의 이름으로 화환을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특수 관계를 아는 소식통들은 “김 씨가 어떻게 북한 당국에 체포돼 간첩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는지 도대체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그를 잘 아는 한 지인은 “김 씨가 북한을 오가면서 ‘(북한 당국이) 숙제를 너무 많이 줘서 머리가 아프다’는 말을 하곤 했다”며 “중국 등 외부의 소식을 북한에 전달하는 역할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한국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닌 김 씨는 10대 후반에 미국으로 혼자 건너가 청소와 햄버거 장사 등을 해서 돈을 버는 등 자수성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에서 30년 이상 체류하면서 시민권도 얻은 김 씨는 모 대학에서 신학 및 철학 박사학위도 받았다. 그는 미국에 유학 온 조선족 여성과 만나 사귄 뒤 중국 옌지로 옮겨와 살면서 나선 등을 오가며 사업을 해왔다. 나선의 호텔 외에도 청진에서 소규모 봉제 공장을 운영하기도 했으며 훈춘에도 작은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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