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대통령이 입법 촉구 가두서명에 나선 초유의 사태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월 19일 00시 00분


어제는 대한민국 헌정사에 기록될 만한 날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에 계류된 민생법안 통과를 촉구하기 위해 경제단체와 시민단체들이 주도한 ‘민생구하기 입법 촉구 1000만 서명운동’에 참여했다. 박 대통령은 경기 성남시 판교역 광장에서 열린 행사에 들러 서명한 뒤 국민의 동참을 촉구했다. “얼마나 답답하면 서명운동까지 벌이겠습니까. 그래서 힘을 보태드리려고 참가했습니다”라는 대통령의 말에 공감하는 국민이 적지 않을 것이다.

대통령은 행정부 수반이지만 법안을 발의할 수 있어 사실상 입법 주체이기도 하다. 그런 대통령이 입법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에 동참한 것은 전례가 없다. 1986년 직선제 개헌 서명운동처럼 ‘입법운동’은 권위주의 정권 시절 야당이나 사회단체의 전유물이었다. 대통령이 추운 날씨에 거리 서명까지 하는 지경이 됐으면 ‘야당 독재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른바 ‘국회선진화법’이 등장한 이후 야당은 자신들 뜻에 맞지 않으면 법안 처리는커녕 심의도 하지 않았다. 야당이 ‘법안 연계 처리’를 고집해 여당이 공무원연금법 개정안 처리를 위해 국회법 개정안을 ‘거래’했다가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일도 벌어졌다.

그럼에도 국가원수인 대통령마저 장외(場外)로 나서는 현실은 안타깝고 불편하다. 선진화법은 2012년 박 대통령이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있을 때 주도해 통과시킨 법이다. 박 대통령은 야당 탓만 하기 전에 ‘원죄’를 인정하고 아프게 반성했는가. 길거리 서명운동보다는 야당 대표와 국회의장을 청와대로 초청해서, 아니 직접 찾아가서 호소하는 것이 대통령다운 일이다.

새누리당은 어제 단독으로 운영위원회를 열어 이미 제출한 선진화법 개정안을 폐기 처리했다. 현행 국회법 87조에 따라 상임위에서 폐기했더라도 7일 이내에 30인 이상이 요청하면 바로 본회의 회부가 가능하다는 점을 노린 일종의 꼼수다. 김무성 대표도 어제 신년 기자회견에서 “개정안의 직권상정을 강력하게 요구한다”고 했다. 정의화 국회의장은 불쾌한 반응이다. 선진화법을 틀어쥐고 법안 처리를 가로막는 야당 못지않게 이런 여당과 대표, 대통령이 우리를 답답하게 한다.
#민생법안#선진화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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