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한 해 동안 2차 세계대전 종전 70주년과 이스라엘-독일 및 한일 수교 5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에서 숱하게 받은 질문이다. 독일과 일본의 화해 정책을 비교 분석하는 자리에서 많은 유럽 학자는 “우리는 훌륭한 정치 지도자와 성숙한 시민사회 덕분에 적대국 간의 화해 정책을 잘 추진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반면, 아시아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화해에 실패했을 뿐 아니라 향후 50년간도 성공할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리곤 했다. 언짢은 표정을 짓는 한일 학자가 많았지만 시원하게 반론을 제기한 이들은 없었다. 유럽 학자들의 견해를 보기 좋게 뒤집을 수도 있었던 일본군 위안부 한일 협상 타결이 결국에는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격이 되고 말았다.
국가 간 화해를 논할 때 우리는 양국 지도자들이 취해야 할 정책이나 국민 간 사회문화적 교류에 초점을 둔다. 하지만 한 국가 지도자와 국민 사이의 대화에 관해선 많이 이야기하지 않는다. 과거 독일의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는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기 전에 상대국 지도자뿐 아니라 자국 국민들과도 여러 번 대담을 나눴다. 본인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또는 사용하고자 하는 표현들이 상대방에게도 같은 의미로 이해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대화는 일방통행적인 모놀로그가 아니라 주고받는 다이얼로그다. “하고 싶은 말 다했으니까 난 끝”이 아니다. 내가 이야기할 때 상대방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주의를 기울일 줄 알고, 듣고 싶지 않을 때조차도 들어줄 줄 아는 것이 대화다.
1963년 프랑스 독일 사이의 엘리제 조약 체결에 앞서 드골 대통령과 아데나워 총리는 몇 달간 40번 이상 편지를 주고받고, 15번 이상 사적인 자리에서 만났다. 그들은 가끔 부부 동반으로 서로의 집을 방문하기도 했다. 또 100시간 이상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그들만큼의 노력을 기울였는지는 평하기 어렵지만, 국제 무대에서 서로 얼굴도 보려 하지 않았던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잠시나마라도 마주했다는 것은 분명 작은 첫걸음이다.
하지만 ‘희망이 있기는 한 것이냐’는 유럽 학자들의 도전적인 질문에 답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관계는 깨는 것보다 회복시키는 것이 어렵다. 사랑한 적이 있는 사람을 미워하는 것보다 미워한 적이 있는 사람을 다시 사랑하게 되는 것이 더 어려운 것과 같은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화해는 그냥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직접 겪지도 않은 일로 인해 젊은 세대들이 서로 미워하는 감정을 키우기 전에, 왜 상대국 젊은이들이 같은 이슈를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함께 나누며 이해하려고 하는 의지를 심어주어야 한다. “한일 관계는 분명 희망이 있다”고 답할 수 있을 때까지 노력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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