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 권력자를 권력자라고 부르는 게 잘못인가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월 31일 22시 47분


아버지를 아버지라 못 부른 홍길동 시절도 아닌데
권력자 단어 금기어 됐나
국회선진화법 취지 그리 좋다면 진박 물갈이로 문제 해결 될 것
‘동지적 관계’ 자신했던 김무성
이번에도 여왕에 무릎 꿇으면 대통령후보 절대 못 된다


김순덕 논설실장
김순덕 논설실장
“권력자들은 맨얼굴인 ‘생얼’이 드러나는 것이 두렵지 않아야 국민 앞에 당당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

2007년 6월 당시 한나라당 대선 경선 후보였던 박근혜 대통령이 방송기자클럽 초청 강연에서 한 말이다. 겉으론 기자실 폐쇄 같은 언론정책을 편 노무현 대통령 비판이지만 한 꺼풀 들추면 이명박 후보를 겨냥한 중의적 화법이었다. 그때만 해도 박 대통령은 “저는 생얼을 더 많이 보여드리겠다. 원래 화장 안 한 얼굴이 더 예쁘다는 소리를 듣는다”고 유머까지 날려 기자들을 웃게 해줬다.

그 ‘권력자’라는 말을 함부로 입에 담으면 안 된다는 걸 나는 이번에 처음 알았다. 지난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2012년 5월의 이른바 국회선진화법 입법 과정을 말하면서 “그때도 당내 많은 의원이 반대를 했는데 당시 권력자가 찬성으로 돌자 반대하던 의원들이 전부 찬성으로 돌아버렸다”고 한 다음부터다.

당연히 여기서 권력자는 당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던 박 대통령을 지칭한다. 이 얘기를 꺼낸 이유도 분명히 밝혔다. “(권력자의) 공천권에 발목이 잡힌 의원들이 정치적 소신을 굽히지 말라는 뜻에서 100% 상향식 공천을 완성시켰다”는 거다.

그 뒤 친박(친박근혜)들의 김무성 비판이 경쟁하듯 이어진 건 내게 충격이었다. 그때 ‘전부 찬성으로’ 돌아버린 건 아니지만 큰 틀에서 김무성의 지적은 맞다. 그런데도 왜 김무성이 권력자라는 말을 또 하면 분란이 벌어진다는 경고를 받아야 하는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했던 홍길동이 절로 떠오를 판이다.

‘독재자’를 연상케 하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다. 황당하다. 2014년 말 이재만 총무비서관, 정호성 제1부속비서관, 안봉근 제2부속비서관이 청와대 ‘문고리 권력 3인방’이라는 말이 나돌 때 박 대통령은 “이들이 무슨 권력자냐, 일개 내 비서관이고 심부름꾼일 뿐”이라고 했다. 권력자는 대통령 자신인데 무슨 소리냐는 의미로 들린다.

권력자라는 말에 권력자 주변 완장 찬 분들이 벌 떼같이 일어난 이유는 대통령 책임이 크다는 역린(逆鱗)을 김무성이 건드렸기 때문이라고 본다. 신년 기자회견을 복기해 보면, 국회선진화법을 놓고 박 대통령이 비대위원장 시절 여당 주도로 통과시켰고 대통령도 찬성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이 나왔지만 대통령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폭력으로 얼룩진 국회를 바로잡자는 취지였다”는 거다. “이런 좋은 취지를 충분히 살려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정쟁을 더 가중시키고 국회의 입법 기능마저 마비시켰다”고 대통령은 거꾸로 국회를 비난했다.

그렇다면 대통령 곁에는 “그게 아닙니다” 하는 참모가 없다는 얘기다. 대통령이 전화로 물어볼 때만, 그것도 듣고 싶어 할 말만 보고하면서 심기 경호를 기쁨으로 아는 사람만 그득한 모양이다. 그러니 우리나라가 미국과 중국에서 동시에 러브콜을 받는 축복에 빠져 있다고 믿고 있다가 뒤통수 맞는 일까지 벌어진 것이다.

대통령은 국회선진화법도 취지가 훌륭하므로 국회만 진박(진실한 친박)으로 물갈이된다면 문제는 사라진다고 보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김무성은 권력자 운운하며 이를 빌미로 상향식 공천제를 들이댔으니 홍문종 같은 친박의 눈에는 ‘궤도 이탈’이 아닐 수 없다. 그제 친박 실세 최경환이 원내대표 자리에서 쫓겨난 유승민을 빗대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다 하고 뒷다리나 잡더라”라고 공격했듯이 불충(不忠)의 사례가 또 하나 늘어난 꼴이다.

박 대통령 당선 전부터 대통령과의 관계를 동지적 관계로 여겼던 김무성은 수평적 당청 관계를 만들겠다며 당 대표에 당선됐다. 박 대통령이 동지적, 수평적 관계와 거리가 멀다는 것을 그가 몰랐을 리 없다. 그런데도 ‘개헌 봇물론’을 꺼냈다가 대통령에게 공개 사과했고, ‘유승민 사태’가 일어나자 “대통령과 싸워 이길 수 없지 않느냐”며 사퇴에 일조했다. 권력자 발언이든, 상향식 공천이든 김무성이 지금 여기서 또 물러서면 ‘무대(무성 대장)’라는 별명 폐기하고 외유라도 가야 한다.

문제는 그가 신줏단지처럼 붙들고 있는 상향식 공천제로 과연 총선 승리가 가능할지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설령 김무성이 대선 후보가 된다 해도 저출산 대책으로 조선족 대거 이민이나 자녀 셋 낳기 운동을 외치는 리더십에 나라를 맡길 수 있을지는 더 걱정스럽다.

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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