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침 일찍 70대 전직 장관으로부터 이런 내용의 전화를 받았다. “박정희 대통령 이후 남한 국가원수 입에서 ‘(北) 체제 붕괴’라는 말이 나온 것은 처음이다. 방법론 유무를 떠나 국민과 국제사회를 향해 언급했다는 것 자체가 보통 일이 아니다. 나도 들으면서 섬뜩했을 정도였다. 조간신문 1면 제목 크기가 더 컸어야 했다.”
북핵폐기 결기 보였다
대통령 국회 연설이 있었던 그제 저녁 또 다른 전직 장관, 은퇴한 언론사 사장, 중견 학자, 의사들까지 두루 망라한 모임에서도 “속이 후련했다”는 게 중론이었다. 지난 대선에서 다들 ‘박근혜’를 찍긴 했어도 잇단 인사 실패와 불통 리더십에 “정말 이렇게 못할 줄은 몰랐다”며 실망을 감추지 않았던 사람들이 오랜만에 대통령 칭찬을 쏟아냈다. 리얼미터 긴급 여론조사에서도 국민 3명 중 2명이 “대통령 연설 내용에 공감한다”고 했다.
대통령은 이번 연설에서 “북핵은 실전 배치될 것이므로 ‘파국’을 막으려면 ‘근본적’ 해답을 찾아 실천하는 ‘용기’가 필요한 때”라며 현 상황을 명료하게 정리했다. “개성공단 가동 중지는 제반 조치의 ‘시작’에 불과하다”, “지금보다 더 큰 도전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반드시 이뤄내겠다”고 한 대목들에서는 장기 전략하에 북핵을 반드시 폐기시키고 말겠다는 결기가 느껴졌다.
김정은이 숙청한 고위 간부들 이름을 일일이 열거한 것도 눈길이 갔다. 지구상에서 보기 드문 북 정권의 야만성을 만천하에 드러내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졌다. “지금 우리의 자유 인권 번영의 과실을 북녘 주민들도 함께 누리도록 하겠다”는 말에는 우리가 가야 할 통일의 내용과 방향성이 담겼다고 할 수 있다. 단순히 ‘신뢰 프로세스’ 정책의 폐기 정도가 아니라 지난 20년간 대북정책의 근본적 변화를 선언했다는 점에서 가히 ‘박근혜 독트린(doctrine·외교안보 노선의 기본 지침)’이라 할 만하다.
국가안보가 절체절명인 상황에서 밤잠을 설치고 있을 대통령은 요즘 누구를 가장 많이 생각할까.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일 것이다. 박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화가(畵家) 아버지를 둔 자식이 미적 감각이 개발되듯 (퍼스트레이디 시절) 아버지를 수행하면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며 ‘하려는 일이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그것을 풀어갈 만한 실마리는 늘 아버지의 충고에서 나왔다’고 적고 있다. 그제 연설에서 “더 이상 국제사회에 의존하는 무력감을 버리고 우리 스스로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는 대목도 평소 자주국방을 외치던 아버지를 연상케 했다.
박 대통령은 개성공단에서 철수하기 전부터 이미 장래의 실행 플랜과 전략을 설계해 보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여야에서 거론되는 다음 대통령 후보들도 떠올려 보며 ‘누가 차기 정권에서 북핵에 맞설 수 있을까… 내 임기 동안 근본 해결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태산보다 무거운 사명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대통령이란 외로운 자리
박 대통령은 한나라당 대표 시절인 2005년 9월 노무현 대통령과의 청와대 회담에서 이렇게 말한다. “대통령이 어떤 자리인지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봐서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남들은 권력자라 하지만 사실 무척 외로운 자리입니다. 하지만 대통령마다 그 시대에 져야 할 책임이 있으므로 노 대통령께서는 노 대통령 시대의 사명을 잘 생각하고 마무리하셔야 합니다. … 국민을 이길 수 있는 정치인이나 대통령이란 없습니다.”
박 대통령은 과연 시대적 사명을 잘 생각하고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인가. 대한민국은 지금 새로운 시작 앞에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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