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결렬된 북-미 간 평화협정 논의에 대해 미 정부 고위 당국자는 22일(현지 시간) 논평을 내고 “비핵화에 강조점을 두지 않는 북한과의 대화는 없다”고 거듭 밝혔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의 21일 보도에 이어 CNN은 이날 “미국이 북한과 비핵화 및 평화협정을 동시에 논의하려 했다”고 미 정부 당국자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WSJ 기사를 하루 만에 사실상 그대로 받은 것이다. 도대체 북-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북-미 간 접촉은 지난해 12월 전후 한 통의 e메일로 시작됐다. 유엔 북한대표부 고위 당국자가 북-미 간 ‘뉴욕채널’의 미국 측 파트너인 마크 램버트 국무부 한국과장 겸 6자회담 특사에게 보낸 것이다. 2, 3줄 정도의 간단한 e메일로 ‘미국과 평화협정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는 내용을 담았다.
이에 대해 국무부는 ‘선(先)비핵화 논의, 후(後)평화협정 논의’라는 기존 원칙보다는 다소 누그러지고 모호한 역(逆)제안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비핵화 논의가 중요하다. 하지만 평화협정도 논의할 수 있다’는 취지였다. 기존 원칙을 고수할 경우 북한이 접촉을 거부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런 사실을 한국 정부에도 알렸다. 한국 정부는 ‘비핵화 논의가 우선 돼야 한다’는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고, 미국도 수긍했다. 하지만 미국의 역제안에 북한은 “비핵화 논의는 안 된다”고 거부했다. 북-미 간 접촉은 더이상 이어지지 않고 끝났다.
북한의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 이전 벌어진 이 같은 내용의 북-미 접촉은 WSJ의 보도로 뒤늦게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WSJ는 21일 “미국이 비핵화 전제 조건을 포기하고 평화협정 논의에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대북제재에 집중해 온 한미 양국은 발칵 뒤집혔다. 국무부는 요르단을 방문 중인 존 케리 장관을 수행하던 존 커비 대변인을 급히 찾아 논평을 내게 했다. 하지만 커비 대변인은 “북한의 평화협정 논의 제안을 검토했지만 비핵화가 논의에 포함돼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며 WSJ 보도를 일부 확인하는 듯한 브리핑을 했다. CNN도 22일 “미국이 평화협정을 논의할 수 있지만 한반도 비핵화 등 북핵 이슈가 논의에 포함돼야 한다고 북한 측에 얘기했다”고 보도했다.
결국 WSJ와 CNN 보도로 불거진 ‘비핵화, 평화협정 동시 논의설’은 미 정부가 북한을 대화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해 ‘선비핵화 논의, 후평화협정’이라는 기존 원칙에 대해 전보다 유연한 시그널을 보낸 점에 강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나온 것으로 해석된다.
CNN은 특히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지난해 10월 16일 박근혜 대통령과의 워싱턴 정상회담 후 공동 기자회견에서 “이란과 쿠바에 대해 보여준 것처럼 우리 정부는 갈등의 역사를 가진 나라들(북한)에 간여(engage)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발언한 것이 북한 ‘평화협정 논의’ 제의의 시발점인 것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북한의 잇따른 핵·미사일 도발로 미국의 대화 노력은 당분간 수면 아래로 잠길 가능성이 높아졌다. 워싱턴의 한 소식통은 “북-미 접촉 시도 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미 정부는 대북제재에 ‘다걸기(올인)’하고 있다”고 전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