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내 아시아 연구를 선도하는 스탠퍼드대 아시아태평양연구소(APARC) 소장을 11년째 맡고 있는 신기욱 교수를 그제 만났다. 북핵 이후 국제사회와 미국의 움직임에 대해 좀 더 깊이 있는 분석을 듣고 싶어서였다. 33년의 연륜을 자랑하는 이 연구소는 한국과 미국은 물론이고 아시아태평양 지역 정책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美·中·북한 변한 것은 없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 결의안 초안을 어떻게 보나.
“한국 언론이나 정부는 ‘전례 없이 강하고 포괄적인 제재’라고 하지만 미국 언론이나 전문가들은 ‘회의적’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정치적으로 북한을 계속 압박하는 측면은 있지만 이행 강제성도 없고 원유 공급 중단 같은 것도 없다. 무역거래 제재도 과거에 다 있었다. 금융거래 제재도 2005년 방코델타아시아(BDA) 제재에서 얻은 학습효과가 있기 때문에 북한이 바보가 아닌 이상 피해갈 방법을 어느 정도 마련해 놓았을 거다. 무엇보다 중국이 관건이다. 중국이 몇 개월 뒤 흐지부지 않고 중단 없는 이행을 해야 제재의 약발이 먹힐 수 있다. 이번 제재로 북한이 어려워진다 해도 인민들 삶만 힘들어지지 핵이나 미사일 개발 중단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다.”
―사드 배치를 두고 미 국무부 국방부 고위 당국자들이 약간 물러선 듯한 발언을 했다.
“주말에 방한한 국무부 대니얼 러셀 차관보가 ‘사드는 협상용이 아니다’라고 한 게 기본 입장이라고 본다. 이번에 존 케리 국무장관이 왕이 중국 외교부장과 만났을 때 ‘북한 비핵화를 전제로 사드 배치를 안 할 수도 있다’고 한 말은 원론적인 이야기다. 중국의 유엔 제재 동참을 끌어내기 위해 체면을 살려주기 위한 외교적 수사(修辭)로 생각된다.”
―중국이 평화협정 카드를 다시 내밀었고 월스트리트저널(WSJ)도 비핵화를 전제로 북-미가 논의를 했다고 했다.
“WSJ의 보도는 북-미 평화협정 논의가 있었다는 것보다 미국이 ‘비핵화’를 전제했다는 점에 더 무게를 두고 싶다. 북한도 그대로이고 미국도 바뀐 게 없다. 한국을 빼고 북-미 간에 모종의 협상이 있는 것 아니냐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미국에서 그럴 움직임이 있거나 북한이 새로운 것을 제안한 것도 아니다. 큰 의미를 둘 정도는 아니라고 본다.”
―어떻든 한반도의 운명이 미중 간의 고공 플레이로 결정되는 것 같다.
“우리가 좀 예민한 것 같다. 피해의식일 수도 있다. 거꾸로 더 이상 미중에 끌려다니지 말고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자신감의 표현으로도 읽힌다. 어떻든 이번 4차 핵실험은 한국에 중요한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그게 뭔가.
“북한 비핵화 정책을 포기할 건지, 아니면 계속 그 목표를 갖고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제재와 지원을 반복할 것인지 선택을 해야 할 결정적인 때가 왔다는 말이다.”
―북한 체제 붕괴를 언급한 대통령 국회 연설이 사실상 비핵화 포기 선언이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대북정책의 방향은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 핵 무장론에는 찬성하지 않지만 비핵화 포기란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므로 우리는 핵을 이고 살아야 한다는 판단에 따라 핵무장을 포함한 모든 안들을 테이블에 올려 놓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북정책, 국민적 합의 필요
―북한이 핵보유국임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은 말장난처럼 들린다. 어차피 핵을 갖고 있지 않나.
“188개국이 가입해 있는 핵확산금지조약(NPT)에 따라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만 핵보유국으로 인정된다.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은 NPT에 가입하지 않고 핵무기 개발에 성공한 나라들이다. 핵보유국으로 인정되면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신고하거나 사찰받을 의무가 없다. 유엔 제재도 없다.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은 그런 뜻이다.”
이어 그는 “이번 대통령 국회 연설은 북핵이 곧 실전 배치될 것이고 어떠한 도전이 와도 해결하겠다는 것을 명시했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접근법을 제시한 것”이라면서도 “문제는 대통령 혼자 던지는 식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국민적 합의가 중요하다. 여야를 두루 만나 이야길 들어보고 공통분모를 찾아내 정책을 만든 뒤 국제사회에 설득하는 게 순서라고 본다”고 충고했다.
―‘국민적 합의’라는 것도 듣기 좋은 수사 같다. 예를 들어 중앙일보 16일자 보도에 따르면 자위적 핵무장에 찬성한다는 의견이 67.7%다. 개성공단 중단 찬성 여론도 절반이 넘는다. 이 정도되면 국론 아닌가.
“대한민국 미래를 거는 중대한 이슈를 여론 조사에 의존할 수는 없다. 더구나 핵 무장론은 국제사회로부터의 고립을 자초하는 일인 데다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다.” 오바마, 북한보다 쿠바 방문 관심
그러면서 그는 ‘페리 프로세스’를 화두로 꺼냈다.
“워싱턴에서도 대북 정책을 둘러싼 이견이 많다. 나는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인 1999년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을 대북특사로 임명해 진행한 ‘페리 프로세스’를 참고하라 말하고 싶다. 당시에도 금창리 지하 핵시설 의혹과 대포동 1호 미사일 발사 때문에 한반도 긴장이 고조되던 때였는데 페리 전 장관이 대북정책조정관 자격으로 여야 정치인을 두루 만나 의견 수렴을 해 정책을 만들었고 이후 한국 일본 동맹국들과 조율을 거친 뒤 북한을 상대했다. 그 결과 이듬해인 2000년 북한 국방위원회 조명록 차수가 김정일 특사 자격으로 클린턴 대통령을 만나고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방북해 김정일을 만나 북-미 공동코뮈니케까지 나왔다.”
―하지만 결국 북한은 일관되게 핵개발에 집중했다. 지난 20여 년간 미국의 노력도 물거품으로 돌아간 것 아닌가.
“제네바 합의 같은 핵 동결 노력이 없었다면 지금 북핵이 10개가 아니라 100개가 있을 것이라는 시그프리드 헤커 박사(미국 북핵 전문가) 말로 답을 대신하고 싶다.”
―최근 미국 내 여론조사를 보면 북한이 러시아 이슬람국가(IS)를 제치고 최대 적으로 꼽혔다. 미국 사람들은 정말 북핵으로 본토가 위험하다고 생각하나.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그렇지 않다. 이번 핵실험도 충분히 예상되었던 일로 새로운 것은 아니지 않은가. 위협이 커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세계 최강의 핵전력을 갖고 있고 지리적으로 1만 km나 떨어져 있는 미국이 북핵을 현실적 위협으로 볼 수는 없다. 미국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북한 핵물질이나 기술이 테러집단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도 북핵은 큰 이슈가 아니다. 내년 초 미국에 새 정부가 들어서도 큰 기대를 하기는 어렵다. 지금 오바마 대통령의 가장 큰 관심은 북한이 아니라 3월에 있을 쿠바 방문이다.”
외교안보 컨트롤 타워 약하다
그는 이 대목에서 “4차 핵실험 때가 3차 핵실험 때와 한 가지가 의미 있게 다르긴 하다”고 운을 뗐다.
―그게 뭔가.
“박근혜 대통령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한반도 통일과 북핵 문제를 상의할 정도로 가까워지지 않았는가. 큰 변화라고 본다.”
―하지만 중국은 본색을 보여주고 있다.
“대통령도 화가 많이 났을 것이라 생각된다. 혹자들은 베이징만 가도 중국인들이 정부 비판을 내놓고 하는 등 많이 변했다고 하지만 겉만 본 것이라 생각한다. 동북 3성만 가도 북-중 교류가 더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 확 느껴진다. 최근에 스탠퍼드대를 방문한 중국 정부 고위 당국자에게 ‘중국이 정말 바뀌고 있느냐’고 묻자 ‘노(No)’라고 단호하게 말하더라. 그동안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는 중국의 립서비스나 의전 같은 ‘매력 공세’에 넘어가선 안 된다고 말해왔는데 지금 상황은 참 안타깝다.”
―지금 시점에서 우리 정부는 뭘 어떻게 해야 하나.
“외교안보를 총지휘하는 컨트롤 타워가 너무 약해 보인다. 큰 그림이나 전략을 갖고 움직이기보다 문제가 터지면 뒤쫓아 가기에 급급하다. 중국에는 공을 들이면서 일본과는 갈등으로 3년을 보냈다. 사드 배치도 처음엔 ‘협의조차 없다’고 하다 갑자기 배치로 돌아섰다. 차분하게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하고 본질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할 때다.”
―좀 더 구체적으로 제언한다면….
“국가안전보장회의(NSC), 통일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평통), 통일준비위원회로 분산되어 있는 관련 조직을 통합해 하나의 조직으로 단순화할 필요가 있다. 3차 핵실험 직후인 2013년 2월 18일자 동아일보 특별 기고를 통해 ‘대북특사를 임명해 특사 외교를 하라’고 주문했다. 이런 처방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제는 고래 틈에 끼인 새우 신세가 아니라 날렵하고 지능도 좋은 ‘돌고래’라는 생각으로 보다 주도적인 외교를 펼쳐 나가야 한다. 경제력 군사력을 합치면 세계 15위권 강소국(强小國) 대한민국이 남들 쳐다볼 때는 아니지 않은가. 4차 북핵 실험을 통해 위기의식과 외교적 자신감을 갖는다면 오히려 전화위복의 성과다.”
신 교수는 안식년을 맞아 서울대 국제대학원에 적을 두고 서울에서 살고 있다. 1983년 한국을 떠난 이후 이번 같은 장기 체류는 처음이다.
―지난 몇 달간 서울 생활 느낌이 어떤가.
“누가 내게 한국은 세 가지 점에서 이상한 나라라고 한 말이 생각난다. 첫째 일본을 우습게 보는 나라, 둘째 자기들이 얼마나 잘살고 있는지 모르는 나라, 셋째 북핵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는 나라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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