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종훈]지도층의 용기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3월 1일 03시 00분


이종훈 정책사회부장
이종훈 정책사회부장
전해 들은 얘기다.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이 최근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려다가 포기했다고 한다. 국회에 ‘파견법’ 처리를 호소하는 방법을 고민하다 나온 구상이었다. “장관이 시위로 국회를 압박하는 모습은 좋지 않다”는 참모들의 만류에 결국 접었다는데 오죽 답답하면 그랬을까. 이 장관은 1월 국무위원으로는 처음으로 국회 정론관에 두 차례나 가서 노동개혁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노동법안의 처리를 요청했다. 지난달 기자간담회에선 “파견으로라도 일하고 싶다는 절박한 요구에 가슴이 미어진다”며 한 파견근로자 이야기를 하다가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이 장관이 ‘쇼’를 하는 게 아니냐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1인 시위 생각이나 눈물이 쇼가 아니라는 걸 나는 안다. 내가 노동부를 출입하던 2004년 이 장관은 대변인이었다. 그때도 파견법 개정안이 뜨거운 사회적 이슈였다. 그가 당시 기자들과 언쟁을 벌여 가며 갈 곳 없는 비정규직 근로자의 처우 문제와 해법에 대해 보여준 깊은 이해와 배려는 잊기 힘들 만큼 인상적이었다. 내가 노동부 취재를 마친 뒤 특별한 인연 없이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가 장관이 돼서 주도한 개정안이 결코 사측 편만 드는 게 아닐 것으로 확신하는 이유다.

19대 국회가 역대 최악이라는 평가는 이제 언급 자체가 지겹다. 민생법안은 서둘러 먼저 처리해온 전통조차 이번 국회에서는 다른 나라 얘기다. 여야 지도부가 처리키로 합의한 법안조차 법사위원장 한 명의 몽니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야당은 파견법이 통과되면 나라가 망할 것처럼 과장을 하고, 노동계는 비정규직만 엄청나게 양산될 것이라고 목청을 높인다. 그러면 고용의 경직성을 완화시켜 경제를 살리려고 애쓰고 있는 독일 등 상당수 선진국들은 뭘 모르는 바보인가.

개정안은 근로자의 파견 업종을 제조업의 근간이 되는 ‘뿌리산업(주조 금형 용접 표면처리 열처리 소성가공 등 6개 분야)’으로 확대하고, 파견 대상에 55세 이상 근로자를 포함시키는 게 핵심이다. 대기업 정규직 노조 중심의 노사 생태계에서 중소기업과 비정규직 근로자를 배려하려는 이 법이야말로 대표적인 민생법안인 것이다. 개정안이 통과될 경우 몇 개의 일자리가 더 생길 것인지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더 시급한 건 이 법이 지향하는 고용 철학과 산업 파급 효과, 해외 자본 유치를 통해 국가 경제 살리기의 핵심 동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또한 ‘N포 세대’로 불리는 20, 30대 청년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선진국의 사회 갈등은 결국 청년실업과 연금개혁 문제로 압축된다. 이 모두 기성세대와 정규직, 안정적 노후를 보장받는 공무원들의 양보와 배려가 필요한 사안이다. 이런 난제를 뚫고 나가려면 정치권의 희생과 결단이 우선이다. 하르츠 개혁이나 바세나르 협약 모두 독일과 네덜란드의 정치권이 당리당략을 떠나 완결시킨 것이다. 그것이 후손들에게 더 나은 세상을 물려줄 책임이 있는 지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이다.

우리 국회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법안을 사장시키는 경우가 허다했다. 19대는 정말로 가관이었다. 쟁점 법안은 5분의 3 이상이 찬성해야 한다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선진화법’ 때문이었다. 야당은 노동계 눈치를 볼 수밖에 없으니 4월 총선 전 파견법 처리는 사실상 물 건너간 것이다. 어렵겠지만 총선 후라도 반드시 임시국회를 열어 법안을 처리해야 한다. 19대 선량(選良)들에게 마지막 용기를 기대한다.

이종훈 정책사회부장 taylor55@donga.com
#선진화법#파견법#19대 국회#청년실업#연금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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