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전 친이계의 친박 학살에…
‘저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며 전면전을 선포했던 대통령
이번 새누리당 공천파동은 명백히 친박계가 오만한 탓
집권 후반기 위상 강화 위해 친박 의원 더 만들려는 시도는
잠시는 성공할지 모르나 여론 위에 군림하려는 무리수
“저는 이번… 공천과정을 보고 우리 정치의 현주소에 좌절과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이번… 공천이 어떤 이유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떤지는 이미 모든 언론과 국민들이 너무나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한마디로 정당정치를 뒤로 후퇴시킨 무원칙한 공천의 결정체였고, … 어리석은 공천이었습니다. … 권력이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권력이 정의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권력’과 ‘정의’라는 말에서 3월 23일 유승민 의원의 새누리당 탈당 회견문이 떠오른다. 아니다. 8년 전 꼭 같은 날인 2008년 3월 23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한 말이다. 박 전 대표는 18대 총선을 앞두고 친이명박계가 친박근혜계 후보들을 줄줄이 공천에서 떨어뜨리자 기자회견을 자청해 당 대표와 지도부를 질타하고 “당을 다시 바로잡겠다”며 전면전을 선포했다. “저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고 한 바로 그 연설이다.
세월이 흘러 이번에는 공수가 바뀌었다. 친박계는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힘이 있는 그룹이 친이계에서 친박계로, 힘이 없는 그룹이 친박계에서 비박계로 바뀐 것 말고는. 달라지지 않은 건 또 있다. 어떤 정치지도자도 직접 경험한 과거에서조차 교훈을 얻지 않는다는.
새누리당의 공천은 자해 수준이다. 새누리당 공천 파행은 아무리 물타기를 해도 친박 세력에 더 큰 책임이 있다. 김무성 대표의 ‘옥새 투쟁’에 대한 사후 평가와 득실 계산은 제각각이다. 하지만 지지자가 적지 않았던 이유는 친박 그룹의 오만함 때문이다. 그 친박계 뒤에 분명 대통령이 존재한다. 그래서 묻고 싶다.
대통령이 유승민 의원을 쳐내고 싶어 한 것은 알겠는데, 이렇게 집요하고 치졸한 방법을 장기간 방치한 이유가 무엇인지. 실행자들은 ‘대통령의 뜻’에 제 손에는 피를 묻히고 싶지 않다는 얄팍한 욕심을 얹었다. 그걸 적절히 제어하지 못한 결과 당 전체가 오랫동안 오물을 뒤집어쓰고, ‘미운 놈’은 털끝조차 못 건드린 채 비단옷에 꽃가마까지 헌상한 블랙코미디로 끝난 것 아닌가.
대통령은 새누리당의 공천이 비난 받고 있으며, 선거판세에 악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보고를 받은 적이 있는지. 보고를 받은 적이 없다면 슬프고, 보고를 받고도 소문처럼 비박을 포함한 180석보다 친박만의 120석이 낫다는 식으로 흘러갔다면 더 슬프다.
3김 시대는 끝났지만 그래도 ‘큰 정치인’의 계보를 잇고 있는 게 박근혜 대통령이다. 그러나 새누리당의 공천 갈등을 보며 이제 큰 정치인은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권한은 마음대로 행사하면서, 공개적인 책임은 지지 않고, 결정적일 때 브레이크도 듣지 않는 ‘큰 정치인’은 지금 시대와 맞지 않는다.
대통령과 측근들, 친박 그룹은 총선에서 이기고 7월 전당대회에서 당권까지 장악한다면 공천의 정당성을 인정받은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틀렸다. 대한민국은 결과가 과정을 무조건 정당화하는 권위주의 시대와 결별한 지 이미 오래다. 19세기 전제주의 사고방식으로, 20세기 계파별 힘의 논리를 앞세워, 21세기 미래형 국민을 리드할 수는 없다. 여론에 아부하는 것보다 여론 위에 군림하려는 것이 더 위험하다.
대통령은 정치인들에게 ‘자기 정치’를 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대권에 꿈이 있는 인물들에게는 지키기 어려운 요구다. 대통령 본인도 18년간 고비 때마다 박근혜식 자기 정치로 존재감을 키워왔기에 오늘이 있는 것 아닌가. 오히려 대통령의 자기 정치는 파괴력이 크기에 자칫 잘못하면 이번처럼 집권당의 신뢰 추락과 정치에 대한 염증을 키울 수 있다.
대통령이 공천에 무리수를 두는 것은 집권 후반기와 퇴임 이후의 지위 강화 포석일 때가 많다. 역대 대통령들이 모두 시도했지만 성공한 적은 없다. 같은 보수 정권이지만 박근혜 정부조차 이명박 정부를 계승했다거나 정권을 재창출했다고는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는다. 설령 새누리당이 다시 정권을 잡는다 해도 비슷하다. 20대 친박 의원의 충성심은 길어야 내년 대통령선거 때까지이다. 4년 후에는 친박이 오히려 주홍글씨가 될지 모른다. 5년 단임제의 숙명이다. 박 대통령도 정상에 올라 보니 다른 대통령들처럼 ‘나는 다르다’는 신기루에 빠진 것은 아닌지. 박 대통령이 퇴임 후 다른 대통령과는 달리 호의적인 평가를 받고 싶다면,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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