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워싱턴 인근 버지니아 주 비에나 시에 사는 기자는 최근 알고 지내는 동네 아저씨들과 미 대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외국인인 기자가 평소 자기네 선거판을 어떻게 보는지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들이다. 40대 후반 A는 보험회사 임원이고, 40대 초반의 B는 여자 축구가 전문인 프리랜서 스포츠 칼럼니스트다. 전형적인 미 백인 중산층인 두 명 모두 도널드 트럼프 얘기만 나오면 손사래를 치는 사람들인데 이날은 좀 달랐다.
A=트럼프가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되는 건가. 미술로 치면 초현실주의인데…. 그런데 요즘 언론을 보면 공화당 지도부가 ‘중재 전당대회’를 열어 트럼프를 막는다는데 이게 가능한 거야?
기자=1952년에 마지막으로 열렸는데, 트럼프가 과반 대의원(1237명)을 못 얻으면 전대를 열고 반(反)트럼프 단일 후보를 내세워 트럼프를 꺾겠다는 거지.
B=나도 트럼프 정말 싫어하지만 축구로 치면 반칙 아닌가. 전당대회 전까지 트럼프가 1위 한 것을 다 무시하겠다는 거 아냐? 트럼프가 전후반까지 3 대 1로 이겼어도 연장전은 0 대 0에서 새로 시작하겠다는 거잖아.
기자=두 사람 다 트럼프 반대파 아니었어? 공화당 지도부가 그 나름으로 머리를 굴려 아이디어를 낸 건데….
A=트럼프를 싫어하는 것과 공화당 지도부가 하려는 짓은 전혀 별개야. 트럼프를 꺾으려면 경선 과정에서 반트럼프 단일 후보를 만들든지…. 공화당이 어떻게 변하겠다든가 뭐 이런 노력도 없이 급한 마음에 민심 왜곡이나 하겠다는 거잖아.
B=공화당이 이 정도로 머리가 나쁘진 않았는데. 설령 트럼프가 전대에서 미끄러지더라도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겠어? 내가 트럼프라도 무소속으로 출마하겠다. 로널드 레이건이라는 전설을 만든 공화당의 원칙은 지금 어디로 갔는지….
(CNN은 17∼20일 여론조사 결과 공화당원의 60%는 “경선 1위가 대선 후보로 지명돼야 한다고 답했다”고 보도했다. 트럼프가 과반 대의원을 확보하지 못하더라도 경선에서 1위를 한다면 대선 후보로 지명되는 게 옳다는 것이다.)
두 사람 얘기를 들으면서 ‘옥새 파동’까지 불러온 새누리당 공천이 오버랩 됐다. 유승민 의원 등 비박계 인사들이 우월한 여론조사 지지율에도 정권에 찍혀 공천을 받지 못한 것이 ‘트럼프 낙마 시나리오’와 묘하게 겹쳤다. 이들에게 한국에서 벌어진 일을 소상하게 설명했다.
B=와! 마담 프레지던트(박근혜 대통령) 힘이 세다던데 어떻게 그런 일이…. 한국 집권당이 공화당과 비슷한 측면이 있네. 한미 보수 정당이 나란히 원칙을 무시하고 말이야.
A=내가 회사에서 숫자를 다뤄서 하는 말인데, 미국에선 여론조사 결과를 다른 말로 ‘수학(math)’이라고 해. 일정 기간 일관성 있게 나온 여론조사 결과는 현대사회에서 움직일 수 없는 판단의 근거 아니겠어? 그건 한국에서도 다를 바 없을 텐데….
기자=아무튼 그러면, 둘 모두 트럼프가 대선 후보가 돼도 상관없다는 거야?
A=그럴 리가. 하지만 트럼프 수준의 지저분한 꼼수는 쓰지 말자는 거지. 잘 모르지만 한국도 그랬으면 좋겠고.
B=원칙이 무너지면 안 되니까.
우연히 나눈 이들과의 대화에서 공화당, 새누리당 두 한미 보수 정당이 민심은 아랑곳하지 않고 꼼수의 덫에 갇혀 위기에 빠졌음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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