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국회의원 선거의 화두는 ‘경제’다. 나라 안팎의 경제 상황이 최악인 만큼 여야는 굵직한 경제 공약을 내세우며 정책 경쟁을 벌이고 있다. 새누리당이 들고나온 ‘한국판 양적완화’ 공약은 경제학계까지 논쟁이 불붙을 정도로 새로운 이슈로 떠올랐다. 더불어민주당은 ‘10년 이상 된 1000만 원 이하 연체 채권 소각’ ‘원리금 2배 지급 국채 발행’이라는 파격적인 공약으로 표심을 자극하고 있다. 경제 전문가들은 여야의 정책 경쟁을 반기면서도 실현 가능성이 떨어지고 공약을 뒷감당할 재원 대책이 부족한 점을 문제로 지적했다.
○ 경제학계 논쟁 불 지핀 ‘양적완화’
이번 총선에서 가장 화제가 된 경제공약은 단연 강봉균 새누리당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의 ‘한국판 양적완화’다. 한국은행이 발권력을 동원해 산업은행 채권과 주택담보대출증권(MBS)을 사들여 부실기업 구조조정과 가계부채 해결을 지원하자는 것이다. 기준금리 인하 대신 중앙은행이 채권 매입으로 시중에 돈을 푸는 방식이다.
화제를 모으긴 했지만 실현 가능성과 효과를 두고는 비판적인 시각이 많다. 유동성 공급 과잉으로 인한 물가상승, 원화가치 하락, 외국인 자본 유출 등의 부작용이 따를 가능성이 크다는 게 경제학계의 중론이다. 가뜩이나 기업·가계의 빚이 부풀어 오른 마당에 중앙은행까지 나서면 국책 금융기관이 지금보다 손쉽게 채권을 발행해 결과적으로 기업부채 및 가계부채 총량이 늘어날 여지도 있다.
또 산업은행의 부실채권 비중(2015년 기준 4.55%)이 2012년 대비 3배로 치솟으며 국책은행 부실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구조조정의 근본 처방 없이 발권력으로 문제를 덮을 경우 두고두고 후유증이 남을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정성태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시중에 풀린 자금으로도 산업은행 채권이나 MBS에 대한 소화 여력은 충분하다”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처럼 금융 시스템이 붕괴되는 예외적인 상황에서나 펼칠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반면 구조조정이 필요한 곳에 맞춤형으로 자금 공급을 하겠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배상근 한국경제연구원 부원장은 “선거 공약으로 적합한지는 따져봐야겠지만 시중에 돈이 안 도는 상황에서 기업과 가계에 직접 자금을 공급하겠다는 아이디어는 논의해 볼 만하다”고 말했다. 총선 후 내년 대통령 선거까지 미뤄질 수 있는 구조조정에 대해 정책 논의의 시동을 걸었다는 차원에서 발전적 논의를 이어갈 불을 지핀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 표심 자극 위한 파격 ‘부채 탕감’
양적완화에 맞서 더민주당은 가계부채 탕감이라는 파격적인 공약을 제시했다. 국민행복기금이 보유한 1000만 원 이하 10년 이상 연체 채권을 즉시 소각해 채무를 없애주고 저신용 서민 114만 명의 소액·장기연체 채권도 행복기금 매입으로 ‘없던 것’으로 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일괄 채무 탕감이 ‘빚은 안 갚고 버티면 된다’는 식의 도덕적 해이를 낳을 수 있다는 우려가 적지 않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7월부터 취약계층의 경우 90%까지 원금 감면이 가능한데도 채권 소각을 약속하는 것은 정치권의 전형적인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이라고 꼬집었다.
재형저축국채를 도입해 20년 만기 시 원금을 2배로 불려주겠다는 더민주당의 공약도 ‘뜨거운 감자’로 부상했다. 재형저축국채를 5년물 국채금리(3월 21일 기준 1.59%)로 발행하되 20년 만기까지 보유할 경우 연 3.5%의 복리를 보장하겠다는 것이 공약의 핵심이다. 그 대신 연간 투자 한도는 1인당(19세 이상) 500만 원으로 제한했다. 정부가 추가 이자를 지급하는 게 시장논리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거세지만 일각에서는 서민·중산층의 ‘종잣돈 마련’을 지원해 주는 긍정적 면도 있다고 말했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경제학)는 “재산 형성에 대한 꿈을 심어준다는 면에서 검토해볼 만한 정책”이라면서도 “저축 기간이 지나치게 길고, 혜택이 서민층에 제대로 돌아가게 하려면 대상을 제한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 공약 뒷감당할 재원 공약은 부족
선거를 앞둔 탓에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증세(增稅) 공약을 구체적으로 내놓은 당은 찾아볼 수 없다. 그나마 안철수 국민의당 상임공동대표가 지난해 12월 “복지 등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재정이 많이 든다면 일정한 증세는 피할 수 없다”며 화두를 던진 건 솔직한 고백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느 세목(稅目)을 어떻게 조정해야 할지를 두고는 새누리당 더민주당과 마찬가지로 별다른 대안을 내놓지 않았다. 국민의당은 거시경제, 금융 등 경제의 큰 틀을 모색하는 공약 대신 국가 연구개발(R&D) 예산의 중소기업 비중을 높이겠다는 등의 중소기업 우대 공약을 내놨다.
새누리당은 강봉균 위원장이 “증세를 안 하면 일본처럼 된다. 일본이 증세를 얘기하지 않고 쓰기만 해서 10년 사이 세계 1위의 국가 부채를 진 나라가 됐다”고 운을 뗐지만 부가가치세 인상을 포함한 구체적인 논의는 선거 이후에 하자고 발을 빼는 모양새다.
더민주당은 과세표준 500억 원 이상 기업의 법인세율을 22%에서 25%로 올리자는 ‘대기업 증세론’을 꺼냈지만 가뜩이나 기업 투자가 얼어붙어 경기 침체가 장기화되는 상황에서 현실성 없는 공약이라는 비판이 적지 않다.
▼ 설익은 경제활성화 공약 ▼
4·13총선을 앞두고 정당들은 경제 활성화를 위한 장밋빛 공약들을 쏟아내고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여야가 내놓은 공약들은 대부분 표심을 의식한 선언적 약속일 뿐 정작 구체적인 ‘액션플랜’이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여당인 새누리당이 내세운 경제 부문 공약 중 ‘내수산업 살리기’와 ‘미래성장동력 육성’을 보면 관광산업 활성화 방안과 중소·중견기업 및 벤처기업 지원 대책들이 주요하게 거론되고 있다. 최근에는 이와 별개로 기업 구조조정 촉진, 기업 규제 원스톱 정비 등을 경제정책 공약 1호로 발표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실행 방안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정근 건국대 금융IT학과 특임교수는 “선언적인 공약만으로는 무엇을 어떻게 바꿔서 경제를 활성화시키겠다는 것인지 판단하기 힘들다”며 “규제 완화 등과 관련해서는 당장 실행 가능한 액션플랜부터 서둘러 수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야당은 여전히 대기업 규제에 집중하는 모양새다. 더불어민주당은 ‘상생과 협력의 경제민주화 완성’을 위해 중소기업 적합업종 보호 특별법 제정, 대기업 법인세 인상 등을 주요 목표로 내세웠다. 국민의당은 경제 부문 공약으로 미래형 신성장산업 육성, 납품단가 제값받기, 갑질방지, 패자부활 등 4가지 실천과제를 제시했다. 국민의당은 특히 갑질방지 과제를 위해 대기업의 이익을 협력업체들과 나누는 ‘초과이익공유제’ 도입도 제안했다.
전문가들도 대기업이 주도하는 기존 산업구조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중소·벤처기업의 활발한 경제활동 참여가 중요하다는 데는 의견을 함께하고 있다. 그러나 대기업의 갑질을 근절하고 불공정 행위를 막기 위한 제도적 장치들은 결과적으로 ‘또 하나의 규제’가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기업 활동은 기본적으로 시장경제에 맡겨야 한다”며 “공정성을 내세우더라도 법의 테두리 안에서 규칙을 만들어야지 특정 집단을 위한 새로운 규제를 만들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다만 벤처기업 활성화 방안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의견이 많았다. 특히 새누리당과 국민의당이 내놓은 “창업에 실패하더라도 재기를 돕는다”는 내용을 담은 공약들은 서둘러 시행돼야 할 과제로 꼽혔다.
전국경제인연합회나 대한상공회의소 등 경제단체들은 정치적 의견 개진이 어렵다는 이유로 여야 정당의 경제정책 공약을 논평하지 않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중요한 것은 실행”이라며 “19대 국회도 경제 활성화를 외쳤지만 결국 경제 주체들의 발목만 잡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
세종=이상훈 january@donga.com /장윤정 기자 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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