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만난 시각장애인 천상미 씨(41)는 20대 총선 후보자의 점자형 선거공보와 일반인들이 보는 책자형 선거공보와 비교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점자형 선거공보에는 일반 선거공보와 같은 내용이라는 문구가 점자로 적혀 있었다. 천 씨는 손으로 더듬거리며 점자형 선거공보 6장을 30분 동안 꼼꼼히 읽었다. “다 읽었지만 후보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네요.”
20대 총선은 시각장애인의 참정권을 보장하기 위해 모든 후보들에게 점자형 선거공보를 제작해 배포하도록 의무화된 첫 선거다. 본보가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의 도움을 받아 서울 구로구을 지역구에 출마하는 후보자 4명과 비례대표 후보자를 낸 정당 10곳의 점자형 선거공보를 비교분석해본 결과 곳곳에서 문제점이 발견됐다.
우선 유권자가 반드시 알아야할 기본적인 정보가 빠져 있었다. 새누리당과 국민의당의 점자형 공보에는 비례대표 후보자의 명단이 아예 없었다. 그 자리에는 장애인 관련 공약이나 표를 달라고 호소하는 감정적인 글이 차지하고 있었다. 천 씨는 “누가 후보자인지도 알 길이 없다. 우리를 유권자로 안 보는 것 같다”며 씁쓸해했다.
공약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도 알기 힘들었다. 강요식 새누리당 후보는 일반 공보에 ‘품격구로’, ‘교육구로’ 등 5가지 슬로건과 세부 공약을 자세하게 담았지만 점자공보에는 오직 슬로건만 적혀 있었다. 천 씨는 “품격구로라는 말만 들어서는 무슨 공약인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가리봉동 고가차로를 철거하겠다는 공약을 내놓았지만 이 공약은 점자형 선거공보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오타도 눈에 띄었다. 강 후보는 점자형 선거공보에 자신의 과거 이력을 현직으로 잘못 썼다. 새누리당 점자형 선거공보에는 ‘자유학기제’가 ‘자유학개제’로 표기돼 있었다. 시각장애인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도 하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 기호 순서대로 일반 선거공보와 달리 점자형 선거공보는 순서가 뒤죽박죽인 채로 배송됐다. 이를 받아본 시각장애인 김훈 씨(44)는 “순서대로 배치하는 데에만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한숨을 쉬었다.
선거공보와 함께 배송되는 투표장소안내문에는 점자가 없어 시각장애인들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김 씨는 “점자가 없는 종이기에 쓰레기인 줄 알았다. 버리기 전에 동료에게 물어보니 투표장소안내문이라고 했다”고 말했다. 투표장소안내문에 QR코드가 있었지만 시각장애인들이 QR코드를 찾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보였다. 천 씨는 이 QR코드를 스마트폰으로 스캔하기 위해 한참동안 헤맸지만 결국 5분이 넘도록 찾지 못했다. 기자의 도움으로 이 QR코드를 스캔하자 엉뚱하게도 청각장애인을 위한 수화용 투표안내 동영상이 나왔다.
점자형 선거공보가 도입 취지와 달리 무용지물이 된 것은 근본적으로 점자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잘못된 규정 탓이다. 통상 같은 내용을 글자가 아닌 점자로 표현하려면 약 3배 정도의 공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선관위는 점자형 선거공보 장수를 일반 선거공보와 같은 12장으로 제한했다. 지면 분량이 부족하다보니 출마자나 정당들은 어쩔 수 없이 점자형 선거공보에는 일부 내용만 담아야 했던 것이다.
강완식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정책팀장은 “지난해 공직선거법을 개정하면서 선관위에 점자형 선거공보의 면수제한을 폐지해달라고 요구했지만 반영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선관위 관계자는 “내용을 강제하는 조항이 없다보니 면수제한을 그대로 둔 것으로 안다”며 “선거가 끝난 후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면 법 개정을 통해 개선해 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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