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3총선을 앞두고 선거구별로 여론조사 결과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여론조사공정심의위원회에 등록된 여론조사 건수만 9일 현재 1400개를 넘는다. 253개 선거구를 기준으로 선거구당 5건이 넘는 여론조사 결과가 생산된 것이다. 하지만 같은 선거구인데도 여당 후보와 야당 후보의 지지율이 엎치락뒤치락하는 조사가 적지 않아 유권자들은 혼란스럽다. 일각에서는 ‘여론조사 무용론’까지 나온다. 국내 시장점유율 ‘빅3’ 여론조사회사 중 한 곳인 미디어리서치의 김정훈 대표이사(54)를 만나 속사정을 들어봤다. 값싼 ARS 엉터리 조사 못 믿어
―여론조사회사들이 반성문 써야 하지 않나.
“인정한다. 그러나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면밀히 따져봐야 한다. 여론조사는 알다시피 전화번호부를 이용한 표본조사다. 집 전화를 안 쓰는 사람이 늘고 있는데 행정구역별로 모집단 전체를 담은 자료는 구할 수가 없다. 불완전한 자료에서 표본을 뽑으니 성별 연령별로 보완해도 한계가 있다. 또 표본조사니까 조사할 때마다 결과는 달라진다. 역설적으로 결과가 똑같으면 더 이상한 거다.”
―그래도 3월 말 부산 북-강서갑 더불어민주당 전재수 후보의 지지율은 한국사회여론연구소가 51.8%, 리서치앤리서치가 26.4%로 내놓아 25%포인트 넘게 차이가 났다.
“표본오차 범위 안에 변동폭이 있어야 하는데 훨씬 벗어났으니 엉터리가 될 수밖에 없다. 표본 추출, 전화 조사, 데이터 분석, 결과 공표, 활용의 각 단계 중 어디선가 왜곡이나 편법이 있었다는 얘기다.”
―북-강서갑 조사에서 하나는 유선ARS(자동응답시스템), 다른 하나는 유선전화 면접 방식이었는데….
“한국통계학회와 한국조사연구학회에선 ARS가 비과학적 조사이므로 실시해선 안 된다고 판단했다. 전화 면접조사와 ARS는 분명히 차이가 있고 ARS는 엄청난 실패 사례들이 있었다. 조사협회 회원사들은 2014년 ARS 조사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ARS가 걸려오면 아이들이 장난 삼아 번호를 누르기도 한다. ARS는 응답률도 아주 낮다. 응답률이 1%라면 1000명 시도해 10명이 응답한 것이다. 500명의 응답을 받으려면 5만 명에게 ARS를 돌려야 한다. 학계에서는 응답률이 극히 낮은 조사는 공표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ARS는 돈이 별로 들지 않으니 너도나도 무분별하게 시행한다.” ―선관위 여론조사공정심의위가 걸러내지 않나.
“현재 ARS 조사라도 선거여론조사 기준의 조사방법 표본 크기 같은 요건만 충족하면 심의위에 등록할 수 있어 주로 지방 언론사들이 인용해 보도한다. 조사 결과가 폭주하니까 심의위가 물리적으로 일일이 모니터링할 수 없을 거다. 우리가 쓰레기라고 부르는 조사가 지금도 많다. 2014년 지방선거 때는 ‘여의도를 평정했다’는 대표적인 ARS 조사회사 사장이 심의위 위원이었다. 그런데 그 회사가 심의위로부터 과태료 처분을 받았다. 이런 난센스가 어디 있나. 그래서 올해 초에 조사회사 사장이나 관계자는 심의위에서 사퇴하자고 해서 다 빠졌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여론조사공정심의위는 작년 10월 16일부터 올해 3월 8일까지 등록된 모든 조사를 심의해 7개 회사 53건의 조사가 기준을 위반했다며 과태료 부과와 경고 등의 조치를 내렸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 이후 집중적으로 쏟아진 조사의 종합적 심의 결과는 아직 공표되지 않았다.
―여론조사회사 인증제, 조사 결과 책임제를 하자는 의견까지 나온다.
“조사회사 인증제는 굉장히 중요하고 본다. 선거 때 ARS 기계 하나 갖다 놓고 사업자 등록을 한 뒤 영업하는 ‘듣보잡’ 회사가 너무 많다. 국제표준화기구(ISO)20252라는 게 있다. 리서치 조사를 심의해 인증해 주는 제도다. 무려 580개의 체크리스트 심의를 통과해야 한다. 우리도 조사 품질에 이런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이건 규제가 아니다. 조사회사들을 방문해 보면 정말 부끄러울 정도다.” 선거 전 여론조사 규제는 필요악
―인증제도 규제고 투표일 6일 전부터 조사 결과를 공표하지 못하는 것도 규제다.
“규제라는 관점에서 보면 황당하다. 민주주의 선거를 하는 나라에서 필요한 정보가 제공돼야 투표를 할 수 있지 않나. 투표일 전까지 후보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정보가 제공돼야 하는 건 맞다. 그런데 엉터리 조사 결과가 투표일 전날까지 공표된다면 선거를 완전히 왜곡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그래서 조사 결과 공표 금지는 합목적적 순기능이 있다. 조사회사가 인증을 받았거나 조사 원칙을 지킨 결과를 내놓는다면 당연히 투표일 전날까지도 조사 결과를 공표할 수 있다고 본다.” ―유선전화 조사는 여당에 유리하다던데….
“물론 그런 경향이 있다. 집으로 전화하면 여당 지지 성향인 주부나 고령층이 주로 받는다. 20대는 집에 없으니 하루 종일 전화 걸어도 2, 3명밖에 답을 얻지 못한다. 예를 들어 20대 남자 10명의 답을 받아야 한다면 마감시간 제한 때문에 4명만 조사하고 2.5의 가중치를 줘 10명을 만드는 거다. 극단적으로 이 4명이 모두 야당 지지 성향이면 20대 남자는 전부 야당 지지라고 하는 엄청나게 편향된 결과가 나오게 된다.”
―집 전화가 없는 가구도 절반 정도이니 무선전화 조사를 추가하면 되지 않나.
“한번 물어보자. 무선전화로만 1000명을 조사하면 정확하게 현실을 반영했다고 할 수 있나. 이번 총선에서 60대 이상 유권자는 23.4%로 가장 많다. 이들은 무선전화나 애플리케이션(앱) 조사에 잘 응답하지 못한다. 고학력 고령층이 주로 답변해 결과가 치우칠 수도 있다.” ―그럼 유선과 무선을 반반씩 섞으면….
“상식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런다고 현실을 제대로 반영할 수 있을까. 나는 투표율도 변수라고 본다. 투표율은 고령층이 높다. 무선전화 면접을 추가해 억지로 20대 응답 건수를 맞춰 놓은 조사 결과와 실제 전체 연령대의 투표 결과는 다르다. 지금은 어떤 배합이 옳다고 말할 수 없다. 몇몇 조사회사가 자체적으로 확보한 패널의 무선전화 조사로 보완했다고 하지만 대표성이 있는지 의문이다. 패널은 설문을 반복하다 보면 길들여진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학계도 비과학적이라고 비판만 하지 말고 시도별 도농별 특성 등을 연구해서 유무선 배합 모델을 제시해 줘야 한다. 나는 선거가 끝나면 유무선 듀얼 프레임의 최적 조합을 주제로 박사논문(그는 고려대 통계학과에서 학사, 석사를 받았다)을 쓰려고 한다.”
오차와 소음 섞여 민심 왜곡 문제
―이번 총선에서는 정당들만 무선전화 안심번호를 이용해 여론조사로 후보를 결정했고 단일화도 한다. 이 과정에서 역(逆)선택 위험이 많지 않은가.
“많다. 19대 총선 서울 관악을 야권 후보 단일화 때 통합진보당이 착신전환을 해 유죄 판결을 받지 않았나. 선거운동을 잘하고 정책을 잘 전달하는 것보다 여론조사가 그만큼 중요하니까 여기에 매달린다. 2002년 노무현-정몽준 대통령 후보 단일화 때 당시 새천년민주당이 우리 회사에 여론조사를 맡아 달라고 했다. 나는 여론조사는 그런 데 쓰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거절했다. 그런데 지금도 상향식 공천이라며 여론조사로 후보를 결정한다. 이렇게 할 거라면 투표는 왜 하는지 모르겠다. 여론조사에는 통계 오차에, 거짓 응답에, 장난 답변에, 역선택 등 온갖 것이 끼어든다. 일부 캠프에서는 도상훈련까지 한다. 일반 유권자도 여론조사가 공천에 활용되니까 지지하는 후보를 위해 자발적으로 역선택에 나선다. 정당이 철학이나 이념에 맞고 경쟁력도 있는 후보를 정치적 판단에 따라 공천해야지 여론조사만으로 결정하는 것은 정말 문제가 있다.” ―그래도 안심번호는 계속 사용하지 않겠나.
“선거가 끝나고 안심번호로 조사하지 않으면 엉터리 결과가 된다는 진단이 나오면 계속 사용하게 될 거다. 그런데 예비후보 경선에서 이동통신사들은 일회용 안심번호 한 건에 330원을 받았다. 10배수를 받아야 유효 표본이 나오니까 계산해보면 예비후보들이 꽤 부담을 떠안았다. 조사업계에서 볼 때 지나치게 비쌌다. 각 당이 공천을 쫓기듯이 해 여유가 없었고 이동통신사들도 밀어붙이면서 값이 올라갔다. 이것이 기준이 돼 언론사도 안심번호로 여론조사를 하면 번호 추출비용을 추가로 내야 할 것이다. 공익 목적의 여론조사에는 별도의 기준을 적용하도록 개선 방안을 찾아야 한다.”
―듣다 보니 여론조사 무용론이 나올 만하다.
“그렇지는 않다. 후보는 한계가 있는 자원을 어디에 가장 효율적으로 투입할지 고민한다. 이럴 때 전략적인 판단을 끌어내는 데 여론조사가 필요하다. 유권자들이 어느 측면에서 후보들을 평가하는지, 어느 매체가 후보의 정보를 전달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 유권자들이 후보로부터 바라는 내용이 뭔지 등 이런 항목들을 파악하고 여기에 맞춰서 운동한다면 여론조사가 매우 유용하다.”
국민의당 정당 득표율 상승 주목
―주변에서 예상 의석수를 많이 물어볼 텐데….
“지금까지의 데이터로 분석하면 현 시점에서는 대략 맞힐 수도 있다고 본다. 하지만 투표일까지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국민의당이 호남 중심으로 입지를 만들어가고 수도권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면 정당 득표율이 좀 더 높아질 여지가 다분히 있다. 이것이 상승작용을 하면 수도권 지역구에서도 후보들이 선전할 수도 있다. 어쨌든 사내 사회조사본부에서 한번 분석해보긴 할 거다.”
―방송 3사 출구조사에 참여하나.
“경쟁 프레젠테이션에서 떨어졌다.” ―초접전 지역이 많으니까 출구조사 때문에 망신은 당하지 않겠다.
“과거와 달리 갈수록 출구조사에서도 응답을 잘 안 해준다. 강원 홍천-철원-양구-화천-인제 같은 공룡 선거구는 아마 10곳 정도 투표소를 선정할 거다. 투표소를 아차 잘못 고르면 결과가 완전히 벗어날 위험성이 굉장히 크다. 선거구를 획정하면서 각기 다른 시군이 한 선거구를 이룬 곳도 있다. 시군별로 뚜렷한 지역성에 따라 후보를 지지하기 때문에 출구조사가 굉장히 어렵다. 방송사들도 출구조사 결과가 오차범위 안에 들면 ‘예측이 불가능하다’ 또는 ‘어느 후보가 당선될지 모른다’라고 발표해야 한다. 출구조사에서 1%포인트 높게 나온 후보가 실제로는 낙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2002년 노무현 민주당 후보의 득표율을 정확하게 맞혔다고 했다. 출구조사에서 나온 3, 4%의 무응답층 지지 성향까지 통계학 기법인 판별 분석을 동원해 도출한 수치였다. 그런데 그는 이 성과를 “운(運)이었다”고 했다. 우리 사회가 이번 총선 과정에서 숱하게 제기된 문제를 개선하지 않고 여론조사를 중요한 정치사회적 도구로 계속 오남용한다면 정치가 너무 운적인 요소에 좌우되는 불합리한 현상이 빚어질 것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