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 원유철 비상대책위원장이 어제 “총선 민의를 참회하는 마음으로 무겁고 겸허히 받아들인다”고 사과했다. 그는 “새로 구성될 지도부는 계파 갈등을 넘어서 친박(친박근혜) 비박(비박근혜)도 아닌 오직 친(親)민생의 새누리당이어야 한다”며 “비대위 인선 과정에서도 이 점을 반영하겠다”고 말했다. 죽고살기 식 계파싸움에 매몰됐던 새누리당이 총선 참패를 당하고서야 사과하고 민생을 중심에 놓겠다니 다행스럽다. 그러나 국민이 정작 듣고 싶은 말은 빠졌다.
새누리당은 공천 과정에서 마치 청와대 하수인처럼 박근혜 대통령의 눈에 난 비박계에 칼을 휘둘렀다. ‘당 중심의 당청관계’를 주장했던 유승민 원내대표가 ‘배신의 정치’로 지목받아 쫓겨난 뒤 청와대 ‘오더’에 충실했던 친박계의 오만을 심판한 것이 이번 총선의 민의다. 그렇다면 원 위원장은 당과 청와대의 수평적 관계 정립부터 쇄신책으로 내놓았어야 한다.
원 위원장의 정치적 궤적을 보면 그것이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친박계로 분류되지 않았던 그는 유 의원 후임으로 작년 7월 원내대표가 되자 “당과 청와대는 찰떡궁합”이라고 주장했고, “나를 신(新)박이라 불러 달라”고 했다. 이번 총선에서도 경기권 선대위원장으로 수도권에서 ‘탄핵풍’이 불었던 17대 총선보다 더한 참패를 당한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비대위원장에 앉는다는 게 말이 되는가.
‘총선 결과에 개의치 않겠다’는 식의 ‘친박 내려 꽂기’ 공천으로 의석은 122석으로 졸아들었지만 친박계는 70여 명으로 더 늘어났다. 친박 일각에선 총선 참패의 책임을 김무성 대표의 ‘옥새 파동’으로 돌리려는 조짐마저 보인다. 그렇게 되면 비대위는 새 지도부 선출까지 중립적 역할은 고사하고 친박 지도부를 맞기 위한 양탄자 깔기가 고작일 것이다.
떠나간 민심을 붙잡으려면 원 위원장부터 박 대통령의 사과와 청와대 전면 쇄신 및 개각을 촉구하고 나서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6년 5·31지방선거 참패 후 “한두 번 선거에서 패배했다고 해서 역사의 흐름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라며 독선을 버리지 않았다가 불행한 임기말을 맞았다. 총선 과정을 ‘사후 부검’하는 총선 백서를 만들어 청와대와 함께 패배 원인과 개혁 방향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 원 위원장은 비대위가 구성되는 대로 대통령과 여야 대표까지 포함한 연석회의를 성사시켜 박 대통령이 민심과 소통하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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