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즐기던 노무현 대통령 때도 임기 말엔 받아적기 회의로
레임덕보다 겁나는 ‘집권 노쇠’… 판단력과 결정 역량 나빠져
크고 중요한 일 벌어진 지금, 대통령 주변·정치권 믿지 말고 청와대 밖 賢者 말 들어야
세월호가 기울어지기 시작한 지 30분쯤 지나 청와대 위기관리실 직원이 해경 본청 상황실에 전화를 했다. “몇 명을 구조했느냐.” “영상이나 사진을 보내 달라.” 이후 이런 전화는 계속됐고, 질문도 많고 요구도 많았다.
청와대 쪽의 질문과 요구는 어김없이 구조현장으로 전달됐다. 이 때문에 막상 사람을 구조해야 할 해경은 구조된 사람 수를 세고 보고용 사진 찍는 데 시간을 빼앗겼다.
지난 주말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세월호 특집의 한 부분이다. “아, 이게 이 나라의 청와대인가?” 착 가라앉는 기분인데 사고가 일어난 지 약 1시간 반이 지났을 때 청와대가 해경에 ‘VIP(대통령) 메시지’를 전달한다. 인명 피해가 한 명도 없도록 하고, 객실과 엔진실 등을 철저히 확인하라는 내용이었다.
한 명도 피해가 없도록 하라? 이런 지시가 없으면 사람을 안 구하나? 객실과 엔진실 등을 철저히 확인하라? 배의 구조와 현장 상황도 모르는 대통령이 자칫 상황을 꼬이게 만들 수 있는 구체적인 지시를 내려도 되나?
정작 청와대가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었다. 구조를 잘할 수 있는 사람을 컨트롤타워로 확정하고, 그의 직급이 높건 낮건 그 누구도 간섭하지 못하게 하고, 해경청장은 물론 장관까지도 지휘해 가며 사람을 구하게 하는 것 등이었다. 청와대다운 판단과 결정을 했어야 했다는 말이다.
TV를 껐다. 창가에 서서 지금의 청와대는 어떨까 생각했다. 별로 나아진 것 같지 않았다. 메르스 대응도, 새누리당의 참패를 부른 ‘진실한 사람’ 건도 그렇다. 사람도 조직도 쉽게 변하지 않는다더니, 그래서 잘못된 결정을 내리는 사람과 조직은 내리 잘못된 결정을 내린다더니 그 말이 맞나 보다.
어떡하지? 청년실업 문제와 산업 구조조정 문제, 그리고 북한 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풀어야 할 문제는 태산이고 가야 할 길은 구만리다. 게다가 여소야대에 야다(野多)의 첩첩산중이다. 이런 수준의 판단과 결정 역량이면 이 나라는 어떻게 되나? 암울한 기분에 이 몸도 그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는다.
집권 후반, 길은 내리막이다. 힘이 빠지는 레임덕만이 문제가 아니다. 경험으로 말하자면 판단력과 결정 역량이 떨어지는 노쇠 현상은 더 큰 문제가 된다. 결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열의와 자신감도, 최고 결정권자의 심리적 안정감도, 정보의 양과 질도 점점 더 못해진다는 뜻이다.
일화를 하나 소개하자.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6년 10월 정책기획위원장 겸 대통령정책특보로 다시 청와대로 들어갔다. 대통령정책실장을 그만둔 지 5개월 만이었다.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어느 비서관이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라고 인사를 한다. 덕담인 줄 알았더니 하는 말. “사람들이 (대통령께) 말을 잘 안 합니다. 이제 말씀하실 분이 오셔서….”
정말 그랬다. 수석보좌관 회의의 분위기부터 달랐다. 대부분 고개를 숙이고 뭘 그리 적는지 펜만 움직였다. 대통령 말에 대한 반응도 없었다. 대통령의 눈을 쳐다보며 한마디라도 하기 위해 애쓰던 집권 초기의 그 모습들이 아니었다.
노무현 청와대만의 문제일까? 아니다. 그나마 토론과 대화를 좋아하는 대통령의 청와대가 이럴진대 그렇지 않은 경우는 어떻겠나. 집권 말기로 갈수록 더 좋은 판단과 더 좋은 결정을 기대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앞으로도 1년 10개월, 길을 찾아야 한다. 대통령과 정권을 위해서가 아니다. 국민과 나라를 위해서다. 그러자면 먼저 청와대가 스스로의 판단능력과 결정능력에 문제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대통령과 참모들 모두 스스로의 판단을 믿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위기관리는 매뉴얼을 잘 다듬어 두었다가 따라 하되, 크고 중요한 일은 반드시 청와대 밖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여야 정치권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들 역시 판단력이 낮기는 마찬가지다. 오히려 경험과 지혜를 가진 현자(賢者)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직접 만나면 이들 역시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떨어져 이들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부끄러울 것 없다. 대통령과 참모 개개인의 문제만은 아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집권 후반기의 모든 청와대가 그럴 수 있다. 오기를 부릴 일도 아니다. 국가와 국민을 생각한다면, 이 나라가 처한 다급한 상황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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