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 공화당 후보 지명에 성큼 다가선 도널드 트럼프가 27일 내놓은 외교정책은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긴장감을 준다. 주한미군 철수, 한일 핵무장론, 핵우산 무용론 같은 그의 ‘위험한’ 주장을 마냥 흘려들을 수만은 없게 됐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주장의 옳고 그름을 넘어 미국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요즘 실시간으로 쏟아지는 미 의회, 군과 정보 당국자, 전문가들이 내놓는 북핵 해법의 내용은 각자 다르지만 다음 세 가지는 공유하고 있다. ①버락 오바마 정부의 북핵에 대한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 정책은 실패했고 ②북한은 5차 핵실험을 눈앞에 두고 있으며 ③핵탄두 소형화와 폭발력 증대,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같은 위협적인 기술 진보와 미사일 사거리 증가로 급기야 미국 본토가 위협받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재정적자 증가, 국방예산 부담 같은 국내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지금 미국 내에서는 동아시아 안보정책을 종합적으로 재설계해야 할 시점이 왔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미 전문가들은 북핵 위협 대처를 차기 미국 대통령이 해결해야 할 급선무로 꼽고 있다.
새 대북제재안을 두고 2차 금융제재 등 추가 제재, 한일 핵무장 허용론, 북한 수뇌부 제거를 위한 군사 대응론까지 다양한 의견들이 망라되고 있지만 특효약은 안 보인다. 병명(病名)은 나왔는데 의사와 치료법이 없는 난감한 상황이다.
박근혜 정부도 좌표를 상실했다. 개성공단 철수와 유엔 주도 대북제재 조치를 추진하고 있지만 효과가 별로 크지 않다. 어제 올 들어 세 번째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도 뾰족한 수는 나오지 않았다. 국방부도 핵실험 보도가 나올 때마다 “실전 배치가 임박했다. 대책을 마련하겠다”는 똑같은 내용을 반복할 뿐이다. ‘북은 수소폭탄, 남은 대북확성기가 주력 무기’라는 비아냥거림에 쓴웃음만 나온다.
며칠 전 북-중 거래 현장인 두만강 유역을 다녀온 복수의 재미 학자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분위기가 술렁거리는 정도지 거래에 큰 변화는 없다”는 게 중론이었다. “북한 석탄의 대(對)중국 수출이 줄어든 것은 중국 경기침체가 주 원인이지 제재 때문이 아니다” “중국 내 북한 식당이 어려워진 것도 시진핑의 반(反)부패 정책으로 공직자들의 비싼 식당 출입이 줄었기 때문이다” “북-중 거래는 보따리상이나 중소기업 중심이기 때문에 세컨더리 보이콧도 실효성이 없을 것이다”…“무슨 일이 있으면 하루 이틀 체류하며 기사를 쓰지만 껍데기만 보고 간다”며 한국 언론을 불신하는 말까지 있었다.
북한 외무상 이수용이 23일 “한미 연합 군사훈련을 중단하면 북한도 핵실험을 하지 않겠다”고 한 발언에 비춰 7차 노동당 대회 이후 동아시아 안보 정세에 변화가 예상된다. 북핵은 실전 배치될 것이고 김정은 체제는 강화될 것이 확실하다. 이런 상황에서 미중북 사이에 북-미 평화협정 논의가 진전될 수 있으며, 미국 새 정부의 대북정책은 핵 제거를 목표로 한 ‘전략적 인내 정책’에서 ‘현 수준 동결’을 목표로 하는 비핵화 전략으로 바뀌면서 미중·미북 회담이 진행될 수도 있다. 북한은 원래 한국은 우습게 보고 미국만 상대하겠다는 ‘통미봉남’이었다.
자, 대한민국의 대책은 무엇인가.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 때문에 북한을 공격하지 못한다”고 한 데서 보듯 대한민국은 자칫 김정은의 ‘핵 인질’이 될 수 있다. 더 이상 청와대만 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 민의에 따라 선택된 여야 정치권이 위기에 빠진 한국 안보의 내비게이션을 리셋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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