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자줏빛 굵은 대공 하얀 꽃이 벌고/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본디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여/정(淨)한 모래 틈에 뿌리를 서려두고/미진(微塵)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 받아 사느니라.’
가람 이병기의 시조 ‘난초’ 중 마지막 두 수다. 난초의 청초(淸楚)와 탈속(脫俗)을 눈앞에 그리듯 노래했다. 난초는 꽃과 잎, 향기를 모두 갖춰 군자를 가리키는 대나무 소나무 매화를 제치고 ‘군자 중의 군자’로 꼽힌다고 한다.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에 유배됐을 때 자신을 돌보러 온 아들 상우에게 ‘시우란(示佑蘭)’을 그려주며 이런 글을 적어 넣은 것으로 전해진다. ‘난초 그리기는 자기 마음을 속이지 않는 태도에서 시작해야 한다. 잎 하나, 꽃술 하나라도 자기 마음에 부끄럽지 않은 뒤에야 남에게 보여줄 수 있다.’ 예로부터 난초는 고결함의 상징이었다. 조선 선비들은 난초를 가까이 두고 스스로를 삼가고 돌아봤다.
▷요즘에는 당선 승진 개업 생일 등에 축하의 뜻에서 난초를 보낸다. 하지만 난초의 씨앗은 워낙 작아 발아하는 데 필요한 영양분을 지니고 있지 않다고 한다. 대신 흙 속에 살고 있는 특정 균으로부터 영양을 받아 발아하고 뿌리가 자란 뒤 이 균에 영양을 되갚는 공생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고고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자신의 부족한 점을 공존의 지혜로 보완하고 있다.
▷청와대가 지난달 말 추대된 국민의당 박지원 원내대표와 김성식 정책위의장에게 박근혜 대통령 명의로 축하 난을 보냈다. 제3당의 정책위의장에게까지 난을 보내 축하의 뜻을 전한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2월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박 대통령 생일에 보낸 축하 난이 ‘삼고초란(三顧草蘭)’ 해프닝을 빚은 것이 엊그제다. 박 대통령은 난이나 화환 조화를 보내는 데도 격을 따지며 까다로운 편이라는 말을 들었다. 여소야대의 총선 결과가 박 대통령이 난을 보내는 마음도 바꿔 놓은 것일까. 정치인들이 난을 주고받으며 군자의 덕성과 공존의 슬기도 함께 배웠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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