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의 선택은 정진석이었다. 4·13총선 민심의 쓰나미를 맞고 난파된 새누리당의 첫 선택치고는 너무 평이했다. 정 신임 원내대표가 ‘비상시국용 히든카드’인지 의문이라는 얘기다. 그가 걸어온 길은 쇄신과는 거리가 있다. 충청지역당으로 불린 자민련과 국민중심당에서 재선 의원을 지냈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는 국민중심당을 탈당해 이명박 편에 섰다. 그 보상으로 이듬해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비례대표 의원이 됐다. 지역구 재선 의원이 비례대표로 3선을 한 건 진기록이다. 비례대표로만 5선 고지에 오른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대표의 ‘불멸의 기록’에는 비할 바 아니지만 말이다. 정 원내대표가 그나마 ‘희생’으로 포장할 정치적 자산이 있다면 비례대표직을 던지고 대통령정무수석을 맡은 거다.
정 원내대표가 새누리당의 ‘승리 본색’을 되살릴 인물인지도 의문이다. 이번 총선에선 충남 공주-부여-청양에서 더민주당 후보를 3367표 차이로 이겼다. 국민의당 후보(7350표 득표)가 없었다면 패색이 짙었다. 2014년 충남도지사 선거에선 안희정 후보에게 8.26%포인트, 2012년 19대 총선에선 서울 중구에서 신인 정호준 후보에게 3.95%포인트 차이로 졌다.
그런데도 새누리당은 정 원내대표를 선택했다. 원내대표 경선에 임한 새누리당 당선자들은 이번 총선에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한’ 국민의 마음을 십분 이해했을 것이다. 최선이 아닌 차선을, 그것도 아니면 차악을 선택해야 했을 테니 말이다. 그만큼 새누리당은 선택지가 사라졌다. 차세대 리더도, 개혁 그룹의 씨도 말랐다. ‘씨 없는 수박’은 과학의 진보일지 몰라도 ‘씨 없는 정당’은 민주주의의 퇴보다.
새누리당은 왜 이 지경이 됐는가. 2004년부터 12년간 당의 실질적 주인이었던 박근혜 대통령의 책임이 가볍지 않다. 그는 차세대 리더를 키우지 못했다. 측근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그 결과 김무성 유승민 진영 등 박 대통령과 가까웠던 순서대로 등을 돌렸다. 대통령이 되기 전엔 2인자를 키울 수 없다지만 그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김영삼 대통령은 이회창 손학규 이인제 등을, 김대중 대통령은 노무현을, 노무현 대통령은 김근태 정동영 등을 내각에 중용해 지도자로 키웠다. 이명박 대통령은 ‘박근혜 대항마’로 정운찬 김태호 등을 염두에 뒀다가 내분을 빚기도 했지만 최경환 유정복 등 박근혜 측 인사들을 데려다 썼다. 그게 박 대통령 집권기에 자산이 됐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보수의 한 축인 이명박 진영을 철저히 배제한 데다 자기 사람도 정치적으로 성장시키지 못했다. 그들만의 정치적 공간을 만들어주지 않은 탓이다. 결국 인적 쇄신을 하고 싶어도 인물난에 엄두를 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나마 현 정부에서 성장한 인사라면 최경환 이정현 정도다. 하지만 최 전 경제부총리는 민심의 역풍을 부른 ‘진박(진짜 친박) 마케팅’의 주범으로 몰렸다. 선거를 진두지휘한 김무성 전 대표와 똑같이 책임지라는 건 죄질에 비해 형량이 가혹한지 모른다. 그럼에도 실세 없는 박근혜 정부에서 박 대통령이 책임을 외면한다면 ‘심판 청구서’는 최 전 부총리를 향할 수밖에 없다. 그런 숙명 탓에 최 전 부총리의 운신의 폭은 좁아졌다. 청와대 정무팀은 총선 전날 박 대통령에게 최 전 부총리를 중심으로 한 향후 당 운영 계획을 정리해 보고했다지만 그 보고서가 빛을 볼지는 미지수다.
그렇다고 이제 와 인위적으로 후계자를 키울 시간도, 역량도 없다. 그러나 아직 희망은 있다. 박 대통령이 ‘원래 박근혜’로 돌아가면 된다. 박 대통령의 초기 권력운용 방식은 ‘분권’ 그 자체였다. 2004년 당 대표가 되고 처음 한 일이 박세일에게 비례대표 후보 추천 전권을 넘긴 것이다. 그때 비례대표 의원으로 당에 들어온 인사가 박재완 이주호 등이다. 이때부터 새누리당에 제대로 된 정책이 만들어졌다. 그렇게 훈련된 정책통들이 이명박 정부를 이끌었다.
박 대통령은 2005년 더 파격적인 ‘분권 리더십’을 선보였다. 정적인 홍준표를 당 혁신위원장에 임명하고 위원 선임 전권을 넘겼다. 당시 혁신위원 17명 가운데 친박계는 홍준표의 고려대 후배인 김선동뿐이었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은 자신에게 불리한 대선 후보 선출방안 등 홍준표의 혁신안을 그대로 수용했다.
새누리당이 다시 쇄신 깃발을 들어올릴 출발선은 전당대회다. 전당대회를 통해 박근혜 없이도 독자 생존할 역량과 비전을 보여줘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쇄신 무대를 만들어줄 수 있는 이는 박 대통령뿐이다. 당 대표 시절 전권을 넘겨 당에 활력을 불어넣었듯 누구라도 ‘포스트 박근혜’를 자임하고 ‘뉴(new) 새누리’를 주창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전권을 넘겼을 때 박 대통령은 가장 강한 대표가 됐다. 새누리당이 청와대의 그늘에서 벗어나 스스로 진화할 때 당도 살고, 정권도 산다. 그래서 다시 희망은 박근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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