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최고 간부로 권세를 누리던 시절 늘 상냥하게 웃어주던 이웃사람들, 아버지의 운전사, 가정부, 경비들 모두 나를 외면했다. 9세 소년에 불과한 내가 처음으로 인심의 냉담함을 뼈저리게 느낀 일이었으며 결코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배신 트라우마 공유
중국 최고 지도자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1962년 아버지 시중쉰(習仲勳)이 권력투쟁에 밀려 몰락했을 때를 회고한 글이다(소마 마사루의 ‘시진핑’에서 재인용). 어디서 많이 본 내용 같지 않은가. 박근혜 대통령이 1993년에 출간한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에는 비슷한 얘기들이 나온다. “옛 사진을 정리하면서 다시 한번 느꼈다. 당시 내가 알고 있던 그들과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그들이 한결같은 경우가 그야말로 드물었다… 이러저러한 배신을 하고 변할 것을 생각이나 했겠는가.”
한국과 중국의 최고 지도자는 공교롭게도 ‘배신의 트라우마’를 공유한다. 그 결과 생긴 권력관마저 판에 박은 듯하다. “권력이나 부귀영화는 꽃처럼 쉽게 변한다. 정치란 얼마나 잔혹한가.”(시진핑) “권력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아무 죄 없는 사람의 가슴에 영원히 지우기 힘든 상처를 남길 수도 있다.”(박근혜)
지난해 9월 톈안먼(天安門) 성루 외교로 정점을 찍은 박 대통령의 친중(親中) 노선은 외교가에서도 의아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보수 성향의 박 대통령이 3년이나 친중 외교를 펼친 데는 두 지도자의 정서적 유대가 한몫했다고 나는 본다. 한 살 차이(박근혜 64세, 시진핑 63세)로 권세와 몰락, 배신과 집권을 겪은 ‘공주’와 ‘태자’. 시 주석이 2005년 저장 성 당 서기 자격으로 방한해 만났을 때부터 친밀감을 느꼈을 것이다.
두 지도자의 밀월은 1월 북한 4차 핵실험으로 끝났다. 애초에 중국을 지렛대로 북한의 핵 포기를 유도하려던 박근혜 정부의 외교 전략 자체가 너무 순진무구(?)했다. 리위안차오(李源潮) 중국 국가부주석의 어릴 적 이름은 한자가 다른 위안차오(援朝)다. 리 부주석은 중국에서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이라고 부르는 6·25가 발발한 1950년에 태어났다. 당시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캉메이(抗美)와 위안차오(援朝)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6·25 참전 중국군 전사·행방불명자는 중국 측 발표로 13만 명. 하지만 유엔 참전 16개국 전사자 17만 명보다 많을 것이란 게 정설이다.
유커들의 필수 관광코스에 판문점이 꼽히는 것도 선대가 피 흘려 지킨 북한에 대한 정서가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런 정서가 ‘북한을 포기하면 미군과 국경을 맞닥뜨린다’는 중국의 오랜 국가 전략을 단단히 뒷받침한다. 중국이 대북 압박을 강화한다고, 시진핑이 9일 북한 7차 당 대회에 맞춰 김정은에게 보낸 축전에서 ‘동지(同志)’라는 표현이 빠졌다고 좋아할 수 없는 이유다.
북한 문제는 ‘웨이팅 게임’
북한 문제는 모두 상대가 먼저 변화하기를 기다리는 ‘웨이팅 게임’이다. 한국은 북한 변화(핵과 대남적화 전략 포기), 북한은 미국 변화(평화협정 체결), 미국은 중국 변화(대북 전면 압박), 중국은 한국 변화(친미 노선 탈피)를 기다린다. 어느 나라도 쉽게 변할 수 없기에 풀기 어려운 문제다. 그렇다면 상대의 변화를 기다리기보다는 우리가 변해야 한다. 독자 전쟁 수행능력을 갖춰 미국 도움 없이 북한을 억지(抑止)하고 중국을 견제할 수 있어야 한다. 자강(自强)만이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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