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北 해외식당 ‘꽃 파는 처녀’들의 서글픈 운명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5월 12일 03시 00분


북한의 한 해외 식당에서 여종업원들이 공연하는 모습. 화려한 복장 뒤에 가려진 이들의 피눈물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북한의 한 해외 식당에서 여종업원들이 공연하는 모습. 화려한 복장 뒤에 가려진 이들의 피눈물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주성하 기자
주성하 기자
북한 ‘5대 혁명가극’ 중 최고봉으로 꼽히는 가극 ‘꽃 파는 처녀’의 감정적 절정은 주인공 꽃분이 어머니의 죽음이다. 가난한 꽃분이는 병든 어머니의 약값을 마련하기 위해 앞 못 보는 여동생과 함께 매일 꽃을 꺾어 판다. 거친 산을 누비느라 발에서 피가 흐르고 허기져 쓰러지면서도 거지라고 모욕당해도 오직 어머니만 생각한다.

마침내 약 한 첩을 구한 꽃분이는 온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행복 속에 춤추며 집에 돌아왔지만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뜬 뒤였다. 희망과 절망이 극단적으로 바뀌는 순간, 오열하는 꽃분이를 따라 관객도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다.

1972년 김정일이 직접 창작지도한 가극은 1930년대 초반을 배경으로 착취받고 억압받는 세상을 뒤집어엎는 길은 혁명밖에 없다는 사상을 주입하고 있다.

그런데 1990년대 중반 북한의 ‘고난의 행군’ 시절 가극 속에만 존재하던 꽃분이가 현실에 나타났다. 기차역을 누비며 “꽃 사시오”를 귓속말로 속삭이던 처녀들은 굶어 죽어가는 가족을 구하기 위해 몸을 팔러 나온 북한의 꽃분이였다.

그리고 다시 20여 년이 흘렀다. 이제 북한엔 굶어죽는 사람은 없어졌다. 하지만 꽃분이의 비극은 김정은 시대에 와서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몇 년 전 해외 식당을 담당하는 북한 간부로부터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모 식당엔 2년 전 어머니가 돌아간 줄도 모르는 여종업원이 있어요. 해외 파견 직원들에겐 가족이 사망해도 알리지 못하게 돼 있습니다. 충격을 받고 탈북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편지만 종종 오가지만 보위부 요원이 먼저 검열해 민감한 편지는 소각해버립니다. 그것도 모르고 그 아이는 가끔 시내 외출이 허락될 때마다 어머니 선물을 사 모으고 있습니다. 보는 내가 가슴이 터지는데 이게 사람이 할 짓입니까.”

듣는 나도 가슴이 터졌다. 가극 ‘꽃 파는 처녀’에 등장하는 악독한 친일 지주도 이 정도로 천륜을 짓밟진 않았다.

남쪽에는 해외의 북한 식당 여종업원은 북한에서 중상층 이상 집안 딸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요즘 북한 식당 여직원들은 대다수가 가난한 집 딸들 가운데 인물과 예능을 보고 뽑는다. 오히려 잘사는 집은 딸을 해외에 보내지 않는다. 그곳에서 어떤 인권 유린이 일어나는지 이제는 잘 알려졌기 때문이다.

돈을 아끼느라 여러 명이 비좁게 생활하는 숙소는 감옥이나 다름없다. 그곳에서 중국 TV만 볼 수 있을 뿐 인터넷이란 건 꿈도 못 꾼다. 일주일에 아주 잠깐 허락되는 외출은 서로 감시하라며 둘 이상씩 내보낸다.

보위원 등 상급자에 의한 성폭행도 비일비재하다. 중국에 나오려면 보통 2000달러씩 뇌물을 줘야 한다. 돈이 없어 빚을 내 온 여종업원도 많다. 이들에게 송환시킨다고 협박하면 거절할 용기를 내지 못한다. 성폭행 사건이 빈발하자 요즘은 보위원에게 가족까지 딸려서 함께 내보낸다. 하지만 그게 대책이 될 순 없는 일이다.

중국에 나온 한 북한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

“해외에 나왔던 여성을 며느리 삼기를 꺼리는 집이 많아요. 외국을 경험한 여성들 역시 북한 같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결혼이란 굴레에 묶이는 걸 끔찍해하죠. 해외 식당 여종업원 중엔 시집가기보단 권력자의 첩이 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여성도 많습니다. 권력의 비호 아래 돈 걱정 없이 자유롭게 살 수 있으니까요. 대다수 북한 식당과 상점 여성 책임자는 어느 권력자의 첩이라고 보면 됩니다.”

지난달 초 북한 식당 직원 13명이 탈북한 뒤 중국 내 북한 식당들엔 이 소식이 빠르게 퍼졌다. 소문에 따르면 여종업원 2명이 먼저 탈출했는데 하필이면 이들이 탔던 차가 교통사고를 냈고 공안 조사 과정에 탈북 기도가 드러났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식당 책임자는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보고가 들어가 소환될 상황이었다. 결국 종업원 13명은 한국으로, 7명은 북으로 돌아가는 운명의 결정을 내렸다.

소문을 전해들은 북한 해외 외화벌이 간부들은 “올 것이 왔다”고 탄식하는 분위기라고 한다. 최근 김정은이 각종 대회와 건설을 수시로 이것저것 다 벌여 놓고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외화벌이 과제를 강요하는 바람에 그들조차 “이러다 나도 탈북할지 모르겠다”는 말을 달고 사는 상황이다. 사람이 참고 사는 것도 한계가 있다.

북한은 인민이 착취당하던 낡은 제도를 뒤엎고 새 세상을 세웠다고 자랑해 왔지만 오늘날 북한 인민은 작금의 사회 현실보다 20세기 초반의 착취제도가 차라리 낫다고 푸념한다. 가극 꽃 파는 처녀는 꽃분이가 혁명군이 돼 돌아온 오빠 철룡과 함께 지주를 처단한 뒤 이렇게 선동하는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천대받는 인민들아 일어나서라. 죄악의 이 세상 뒤집어엎자.”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북한 5대 혁명가극#꽃 파는 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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