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공무원 집은 월급으로 굴비 한 마리 안 사먹나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5월 16일 03시 00분


공직자가 고액 선물 안 받으면… 경제 흔들리는 나라가 나라인가
내수위축 우려 김영란법 완화? 부정부패 근절 의지 없다는 의미
가난한 아프리카의 케냐에서… 우리보다 앞선 정책투명성
박 대통령 제대로 배워 오시길

김순덕 논설실장
김순덕 논설실장
음모론이라고 해도 할 수 없다. 지난주 ‘식사 3만 원, 선물 5만 원, 경조사비 10만 원 이상이면 과태료’라는 김영란법(‘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시행령안 예고에도 공직자들은 조용하다. 그 대신 농수축산물 생산단체부터 중소기업단체장들까지 약속한 듯 대통령과 똑같은 소리를 낸다. 지금은 경제를 살려야 할 때라는 거다.

“굴비 선물세트 한 상자가 10만 원인데, 배는 70%가 명절에 팔리는데, 다 망하란 말이냐” 같은 하소연을 들으면 김영란법이 농어촌 잡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런데 한 조간신문이 “김영란법으로 한우 선물이 막히면 명절 매출 8000억 원의 대부분이 사라질 수밖에 없다고 한우 농가들은 주장한다”고 쓴 것을 보고 부아가 나기 시작했다. 아니 그럼, 공무원들은 지금껏 제 월급으론 굴비 한 마리, 한우갈비 한 짝 안 사먹고 살았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작년 3월 ‘직무 관련성 없어도 1회 100만 원, 1년에 300만 원 이상 받으면 형사처벌’을 골자로 한 김영란법이 국회를 통과했을 때도 공무원들은 조용했다. 김영란 전 국민권익위원장의 원안에는 공직자 154만 명에 민법상 가족 10명씩 쳐서 1540만 명이 대상이었다. 그런데 국회 논의 과정에서 느닷없이 사립학교 교직원(21만 명)과 언론인(9만 명)까지 끌려 들어가면서 ‘보완 필요’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아니 ‘스폰서 검사’ 같은 공직부패 잡자고 만든 법에 왜 민간인을 집어넣나?

불의를 보고 못 참는 기자들이 ‘정의감’에 불탔다고 나는 생각했다. 지금 공무원들은 가만있는데 반대 소리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걸 보니 작년 1월 이상민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말이 맞았다. 그는 “김영란법의 발목을 잡았던 새누리당이 갑자기 태도가 돌변해서 적용 대상을 확대했다”면서 “(언론의 반발로) 법안을 무력화하기 위한 것 아니냐 솔직히 그런 의심이 든다”고 했다. 실제로 김영란법은 사립학교 교원과 언론인이 포함되는 바람에 국회 통과 이틀 만에 헌법소원이 청구된 상태다.

국회의원들이, 혹은 그 뒤의 공직자들이 죄 없는 언론과 내수 문제를 건드려 김영란법을 무력화시킨다는 ‘음모’가 사실이라면, 이 나라엔 희망이 없다. 공직자가 고가 선물(한마디로 뇌물이라고 한다)을 안 받으면 국가경제가 흔들린다고 대통령까지 걱정하는 나라가 제대로 된 나라일 순 없다. 현행 공무원행동강령 14조는 ‘공무원은 직무 관련자로부터 금품을 받아선 안 된다’고 돼 있다. 이제야 농수축산업 단체에서 아우성이 나오는 건 그동안 행동강령은 있으나 마나였다는 소리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4년 6월 말 “이 법이 (이번 임시국회에서) 통과되느냐, 안 되느냐가 부정부패나 국가 개조에 대해 우리 정치권 모두 얼마나 의지를 가졌는가의 시금석이 될 것”이라고 했다. 정치권의 의지가 없다는 건 벌써 확인됐다. 정치인의 인사 청탁 같은 ‘이해충돌 방지’ 부분이 사라져 김영란법은 이미 반쪽이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경제 위축을 들어 법안 재검토를 원한다니 세월호 참사 직후 부정부패 근절, 국가 개조 의지가 남아 있는지 의문이다.

박 대통령은 공공기관 성과연봉제 추진을 공공개혁이라고 믿는 모양이지만 턱도 없다. 지금 절박한 것은 그런 수준의 공공개혁이나 노동개혁이 아닌 공직개혁이다. 구조조정은 물론이고 임금피크제나 성과연봉제는 무풍지대면서 출산휴가제, 시간제 근무 같은 좋은 제도는 제일 먼저 누리는 공직사회야말로 박근혜 정부의 특권계급이다. 오죽하면 공무원 많은 세종시의 합계출산율이 지난해 전국 최고(1.90명), 서울(1.00명)의 두 배에 가깝겠나.

정부 경쟁력이라도 높으면 또 모른다. 박 대통령이 밀어붙인 세종시 때문에 공무원들이 국민과 동떨어져 살게 되면서 정책의 질도 떨어졌다는 지적이 파다하다. 세계경제포럼(WEF)이 매긴 2015년 한국의 국가경쟁력은 140개국 중 26위지만 제도 부문만 따지면 69위로 이달 말 박 대통령이 방문하는 케냐(91위)와 큰 차이도 없다.

나랏일을 하는 공직자는 국민에게 어떤 이유로든 부담을 줘선 안 된다는 게 김영란법의 정신이다. 박 대통령은 국민소득이 1416달러밖에 안 되는 케냐가 정책 투명성(61위), 규제 부담(44위)에서 어떻게 우리나라의 정책 투명성(123위), 규제 부담(97위)을 크게 앞설 수 있었는지 똑똑히 배워 오기 바란다.
 
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
#김영란법#공무원#공직자#선물#박근혜#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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