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무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A 씨는 반기문(KM) 유엔 사무총장의 방한 행보를 두고 “모처럼 깔끔한 정무 기획을 봤다”고 극찬했다. KM의 첫 메시지부터 압권이었단다. “국가통합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 그러면서 KM은 한마디를 더 보탰다. “지역구가 뭐가 중요하냐. 세계가 막 돌아가는데….” 단박에 자신은 ‘글로벌 리더’로,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우물 안 개구리’로 갈라치기를 했다.
또 하나의 ‘작품’은 김종필(JP) 전 국무총리와의 단독 회동이었다. 대선후보에게 지역 기반은 필수조건이다. JP의 지지는 ‘충청 대망론’의 출발점이다. 그러면서도 ‘국가통합’에 역행하지 않는다. JP의 정치적 자산이 연대(連帶)이기 때문이다. 그는 김영삼의 PK(부산경남)와도, 김대중(DJ)의 호남과도 손을 잡은 경험이 있다. JP는 스스로 자민련의 창당정신을 ‘왕자불추 내자불거(往者不追 來者不拒)’라 했다. 거창해 보이지만 쉽게 풀면 ‘가는 사람 잡지 않고 오는 사람 막지 않는다’는 뜻이다. JP는 여전히 연대의 막후 조율사로 적임이다.
게다가 90세인 JP가 정치인생을 건 ‘마지막 승부’에 나섰다는 느낌마저 든다. 그는 KM을 만나 “비밀 얘기를 했다”며 자신의 몸값을 극대화했다. 최근엔 “단단히 결심을 굳힌 것 같다”며 ‘KM 불씨 살리기’에 나섰다. KM이 내년 초 금의환향하기 전까지 비밀 얘기를 연료로 ‘불씨 관리자’를 자처한 것이다. 35세에 군사정변을 설계한 이후 권력 주변을 떠나지 않은 JP가 아직까지 이루지 못한 단 하나의 꿈, ‘충청 대망론’을 KM을 통해 완성하는 건 그의 숙명인지 모른다.
KM은 JP를 만난 다음 날 경북 안동을 찾아 ‘충청+TK(대구경북) 연대’를 공식화했다. 정치권에선 지역 연대론에 부정적 시각이 많다. 청산해야 할 구태 정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랴. 지금까지 모든 대통령은 특정 지역의 몰표로 당선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광주(95.2%) 전북(91.6%) 전남(93.4%)에서 표를 쓸어 담지 않았다면 승리할 수 없었다.
충청+TK 연대는 처음이 아니다. 첫 수혜자는 박근혜 대통령이다. 부친 박정희 전 대통령은 경북 구미, 모친 육영수 여사는 충북 옥천이 고향이다. 박 대통령 자체가 충청+TK 연대인 셈이다. 박 대통령은 2012년 대선 때 충북과 충남에서 나란히 56%를 득표하며 승리했다. 만약 KM이 충청에서 70% 이상 득표하고 박 대통령이 TK 표를 몰아준다면 해볼 만한 승부다. 문제는 PK다. 박 대통령은 PK에서 60%를 얻었다. 하지만 이달 말 영남권 신공항이 경남 밀양으로 확정되면 부산은 ‘반(反)박근혜 진영’의 새로운 거점이 될지 모른다.
그래서였을까. KM이 먼저 조급함을 드러냈다. 부산에 교두보를 확보한 친노(친노무현)계의 좌장 이해찬 전 총리에게 손을 내밀었다가 퇴짜를 맞았다. 비공개 회동이 취소된 것도 모자라 “외교관은 정치와 안 맞는다”는 일격을 당했다. 그러자 KM은 9일 언론에 화풀이를 했다. 대선 출마 보도에 “지나치고, 부당하다”며…. 역시 정치력은 ‘벼락치기’로 안 되는 모양이다.
‘현명함은 경험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받아들이는 능력에 비례한다’는 격언은 정치에 딱 들어맞는다. KM은 ‘친노의 역습’에서 깨달아야 한다. 그는 이미 야권의 정적(政敵)일 뿐이다. 선거에선 모두를 얻으려 들면 모두를 잃게 된다. 그래서 중도가 참 어렵다.
그렇다고 박 대통령만 믿고 친박(친박근혜)계의 꽃가마에 올라타는 건 ‘자살행위’다. 박 대통령의 하산(下山)길에 동행하며 스스로 표의 확장성을 차단할 이유가 없다. KM에겐 두 가지 선택이 있다. 노무현의 길과 박근혜의 길이다. 둘 다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지만 선택은 정반대였다. 호남의 지원 없이는 대선후보조차 될 수 없었던 노 전 대통령은 끝까지 DJ를 껴안았다. 반면 박 대통령은 “잘못된 과거와의 깨끗한 단절”이라는 우아한 수사로 이명박 정부와 작별했다.
KM이 귀국길 인천공항에서 받을 첫 질문도 이것이다. 그의 집권은 박근혜 정부의 계승인가, 아니면 권력 교체인가. ‘기름장어’처럼 외교적 레토릭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곧 그의 정치적 비전과 맞닿아 있다. ‘KM 대망론’은 TK를 버릴 수도, 품을 수도 없는 그가 어떤 비전과 소신으로 돌파하느냐에 달렸다. 지역 연대론은 ‘상품성’이 담보될 때 작동하는 마케팅 수단일 뿐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