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인 미국 백악관 시스템은 1930년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때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 때만 하더라도 참모라면 전화를 연결하는 비서이거나 타이프라이터였다. 루스벨트가 참모조직을 확대하고 직속기관을 늘려가자 우려가 나왔다. 그때 그가 참모들을 옹호하기 위해 한 유명한 말이 ‘익명의 열정(passion for anonymity)’이다.
▷우리나라에는 ‘익명의 열정’이 미 중앙정보국(CIA)의 모토인 것처럼 알려져 있으나 그렇지 않다. 이 말은 미국 대통령을 보좌하는 모든 직속기관의 비공식 모토나 다름없었다. 이 말에서 영감을 얻어, 1961년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를 만들고 첫 수장을 지낸 김종필이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국정원의 첫 원훈(院訓)을 만들었다.
▷김대중 정부는 1999년 원훈을 ‘정보는 국력이다’로 바꿨다. CIA의 공식 모토 ‘국가의 일, 정보의 중심(The Work of a Nation, The Center of Intelligence)’처럼 단순하지만 단단한 맛이 있다. 이명박 정부는 이 원훈이 너무 무미건조하다고 봤는지 2008년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無名)의 헌신’으로 고쳤다. CIA의 비공식 모토라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 8장 32절)에 나오는 용어를 교묘하게 뒤섞은 느낌이 든다.
▷박근혜 정부가 원훈을 다시 ‘소리 없는 헌신, 오직 대한민국의 수호와 영광을 위하여’로 바꿨다.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은 학문적 종교적 뉘앙스까지 느껴져 정보기관의 공식 모토로서 적합하지 않아 보인다. ‘소리 없는 헌신’은 ‘익명의 열정’을 현대화한 말로는 ‘무명의 헌신’보다 어감이 좋다. 다만 ‘대한민국의 수호와 영광을 위하여’는 사족(蛇足) 같다. 국정원이 정권 아닌 대한민국에 헌신해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강조하는 말 같기도 하다. 모토만 바꾼다고 실체가 바뀌지 않는다. 실체가 바뀌어야 CIA처럼 수십 년 지나도 바뀌지 않는 모토가 나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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