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권 신공항 건설을 둘러싼 ‘10년 내전(內戰)’은 정치권이 갈등을 ‘조정’하기보다 ‘조장’한다는 지적이 딱 들어맞는 사례다. 모든 대선 후보와 지역 맹주들이 앞장서 지역주민들의 기대감을 한껏 부풀려 놓은 뒤 무리한 추진으로 갈등에 불을 지폈다. 표만 좇는 정치권의 대중영합주의와 위기관리 능력의 부재가 맞물려 국가적 에너지만 낭비한 셈이다.
영남권 신공항 건설 논란은 출발부터 다분히 표심을 겨냥한 것이었다. 2006년 12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대선을 앞두고 부산 기업인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영남권 신공항 건설을 검토하도록 지시했다. 이듬해 대선을 맞아 이명박 정동영 후보가 나란히 공약으로 내세우면서 신공항 추진은 기정사실화됐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당시 경제 타당성 조사에서 경남 밀양과 부산 가덕도 모두 편익보다 비용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때 김해공항 확장으로 결론을 내렸다면 이후 7년간 이어진 지역 간 반목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부산과 대구·경북·울산·경남의 유치전은 더욱 치열해졌고, 어느 한쪽을 택할 경우 ‘민란’이 일어날 정도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결국 이 전 대통령은 2011년 3월 영남권 신공항 건설 백지화를 선언했다.
여기서 끝낼 수 있었던 갈등은 다시 정치권이 개입하면서 불붙었다. 당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박근혜 의원은 지역구인 대구 달성군을 찾아 “(신공항 건설은) 계속 추진해야 한다. 지금 당장 경제성이 없다지만 미래에는 분명 필요할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실제 박 대통령은 2012년 대선에서 지역공약 8대 핵심 정책 중 하나로 신공항 건설을 약속했다. 공약집에 건설 지역을 명시하지 않았지만 박 대통령은 부산 유세에서 “가덕도가 최고 입지라면 당연히 가덕도로 할 것”이라며 여러 차례 ‘가덕도’를 언급했다. TK(대구경북)의 몰표가 예상된 만큼 부산 표심을 겨냥한 셈이었다. 당시 문재인 후보도 “단순히 김해공항의 확장 이전 차원을 넘어 부산 등 동남권 지역의 공동 관문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자 신공항 필요성에 대한 정부의 예측 결과는 180도 달라졌다. 이명박 정부 당시 ‘김해공항의 국제선 운용 여력이 2027년까지 충분하다’던 예측 결과는 ‘2023년 김해공항 활주로가 포화 상태에 이른다’는 것으로 뒤바뀌었다. ‘정치 논리’가 ‘경제 논리’를 압도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됐음에도 결국 정부는 지난해 19억2000만 원을 들여 외국 업체에 한국의 국가 정책을 결정하도록 했다.
지난해 5개 시도는 유치 경쟁을 자제하기로 합의했지만 금세 휴지 조각이 됐다. 4·13총선을 앞두고 새누리당 조원진 의원은 “박 대통령이 대구에 선물 보따리를 준비하고 있다”며 신공항 갈등에 다시 불을 붙였다. 이에 새누리당 부산시당은 가덕도 신공항 건설을 총선 공약에 포함시켜 맞불을 놓았다. 서병수 부산시장은 2014년 지방선거 당시 가덕도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시장에 당선되면 가덕도 신공항 유치에 시장직을 걸겠다”며 지역 대결의 선봉에 섰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도 9일 가덕도를 찾아 “부산이 바라는 대로 될 것”이라며 지역 갈등을 부추겼다.
21일 김해공항 확장으로 결론이 나자 정치권은 다시 들끓고 있다. 여권의 심장부인 대구에서 당선돼 야권의 대선주자로 떠오른 더민주당 김부겸 의원은 “신공항 백지화 발표는 국민을 기만한 것”이라며 “신공항은 결코 포기할 수 없다”고 밝혔다. 내년 대선에서 ‘신공항 건설’ 공약이 또 나올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도 적지 않다. 한 정치권 인사는 “내년 대선에서 다시 포퓰리즘 공약으로 ‘민심 갈라치기’에 나서면 오히려 민심이 철퇴를 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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