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철문 사이로 낯선 모양의 구형 철모 수십 개가 눈에 들어왔다. 세월의 풍파 탓에 군데군데 녹이 슬었지만 계급장과 부대마크의 색깔은 여전히 선명했다.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반세기를 지난 유물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한쪽 벽에는 전쟁 당시 사용했던 반합 수십 개가 매달려 있었다. 낡은 군복과 면도기, 라이터, 기상나팔 등도 눈에 띄었다.
6·25전쟁 66주년을 이틀 앞둔 23일 오전 서울 종로구의 한 사무실에서 국방부유해발굴감식단 대원들이 조심스럽게 ‘전쟁 유물’을 살펴보고 있었다. 대원들은 마스크에 수술용 장갑까지 착용하고 사무실 곳곳을 돌며 빛바랜 군용품을 꼼꼼하게 확인했다. 군복을 살필 때는 옷의 크기, 단추가 달린 위치, 주머니 간격 등 세세한 부분까지 서류에 기록했다. 대원들은 평소 유해 발굴 현장에서 봤던 유품과 비슷한 모양이 나타날 때마다 해묵은 수수께끼를 푼 듯 환호했다. 김우정 상병은 “현장에서 심하게 훼손된 유품들만 보다가 온전한 상태의 물품들을 직접 보니 위장막이 걷힌 듯 후련하다”고 말했다.
전쟁영화 촬영장을 방불케 하는 이곳은 20년 가까이 군용품을 모아 온 이승용 씨(47)의 개인 수집창고다. 이 씨는 광복 직후인 1946년 창설된 국방경비대 보급품부터 6·25전쟁 당시 사용한 군복, 전투화 등을 두루 수집했다. 6·25전쟁 당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군복만 800여 벌이고 철모와 전투화도 500여 개에 이른다. 절반 이상은 6·25전쟁 당시 물품들이다. 이 씨는 전국 각지의 전통시장과 해외 사이트 등을 돌며 관련 물품을 모았다. 400만 원이 넘는 군번줄도 있다.
이날 이 씨는 수집창고를 유해발굴감식단 대원들에게 공개했다. 2000년부터 국군 전사자 유해 발굴 사업을 시작한 대원들이 발굴 과정에서 가장 애를 먹는 것 중 하나는 바로 전사자의 유골 주변에 묻힌 유품의 형태를 확인하는 일이다. 유품 상당수가 심하게 훼손돼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유품 확인 작업이 길어지면 전사자 신원 확인도 어려워진다. 그러나 이 씨가 자신의 수집품 전체를 공개하면서 앞으로 유해발굴감식단의 신원 확인 작업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유해발굴감식단은 이달부터 이 씨가 가진 수집품들의 특징을 모두 기록해 전사자 신원 확인에 활용할 계획이다. 유해발굴감식단은 이번 작업이 6개월 이상 걸릴 것으로 보고 있다.
국방부 관계자는 “그동안 유품을 발굴해도 대부분 형태조차 남아 있지 않아 식별에 애를 먹었다”며 “이 씨의 수집품 덕분에 망망대해에서 나침반을 손에 쥔 듯한 기분”이라고 말했다. 이 씨는 “내 취미가 단순한 즐거움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의미 있는 일에 쓰였으면 한다”며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전사자들의 유해를 하루빨리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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