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 전 영화를 담당할 때다. 함께 점심을 먹으며 배우 품평을 하던 영화기획사 대표가 말했다. “좋은 배우의 얼굴에는 드라마가 있어요.” 깎은 듯, 아니면 깎아서 잘생기고 예쁜 배우는 많다. 그러나 좋은 배우라면 얼굴에 삶의 희로애락과 기승전결이 담겨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알아들었다. 얼굴에서 이야기가 배어나올 때 비로소 진짜 배우가 된다는 얘기다.
정치인도 마찬가지다. 속된 말로 배우처럼 얼굴을 뜯어먹고 살지는 않지만 좋은 정치인이 되려면 자신만의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는 건 정치권의 불문율이다. 하물며 대권에 도전한다면 더욱 그렇다.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는 민주화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지역주의 타파와 동일시됐고,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는 청계천 복원이 따라다녔다. 그렇다면 야권의 대선 유력 주자인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안철수 전 국민의당 상임공동대표에게는 지금 어떤 스토리가 있는 것일까.
솔직히 두 정치인이 갖고 있는 이야기보따리는 거의 비어 있다.
비명에 떠난 노 전 대통령의 운명(殞命)을 차분히 발표하고 듬직하게 빈소를 지키며, 영결식장에서 모 의원의 ‘무례’에 대해 당시 이 대통령에게 정중히 사과하던 문 전 대표. 2012년 대선에 나온 그에게는 노 전 대통령의 ‘부활’이라는 이야기가 녹아 있었다.
2011년 지지율이 자신의 10분의 1밖에 되지 않는 박원순 씨에게 서울시장 후보를 양보한 안 전 대표는 곧바로 ‘안철수 현상’을 불러일으켰다. 이듬해 대선에 나온 그를 두고 ‘메시아가 나타나 우리를 구원할 거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가 나오기도 했다.
문 전 대표는 대선 패배로 자신의 스토리를 소진했고, 안 전 대표는 2014년 민주당(현 더민주당)과의 통합으로 사실상 ‘현상’의 지위를 잃어버렸다. 이후 두 사람이 새로 쓰고 있는 자신의 이야기에는 공통점이 엿보인다.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려는 노력이다. 방법은 강경함과 단호함이다.
문 전 대표는 자신을 흔들어대는 비노(비노무현) 진영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끝내 당 밖으로 몰아냈다고 봐도 무방하다. 김종인 더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를 삼고초려해 총선 승리를 이뤄냈지만 김 대표에게 당을 더 오래 맡길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것을 보여줬다.
안 전 대표는 혁신이라는 화두를 내걸고 문 전 대표와 건곤일척의 쟁투를 벌였다. 새로운 당을 만들고, 김한길 전 의원의 야권통합 시도는 단칼에 잘라냈다. 총선 리베이트 의혹 사건의 책임을 지고 당 대표직을 내놓는 강수를 던졌다. ‘또 철수’라는 평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강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4·13총선의 결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면밀히 따져봐야 한다. 밑바닥에서 끓어오르며 거대하게 움직이는 민심이 어떤 이야기를 바라는지 더 고민해야 한다. 기존의 정치 작법(作法)으로는 이 스토리의 한 문장도 써내려가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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