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옥죄는 20대 국회]<下> 폐기 한달여만에 재활용
의원 발의 법안 592건 전수분석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20대 국회가 개원한 첫 달 서울 여의도에 수시로 출근 도장을 찍었다. 지난달 20∼29일에만 다섯 차례나 국회를 찾았다. “경제활성화 법안을 서둘러 통과시켜 달라”는 뜻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박 회장은 20대 국회 개원을 앞둔 5월 12일 전국상공회의소 회장 회의에서 “향후 몇 달간은 정치권과 경제계가 팀워크를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시기가 될 것”이라고 기대를 나타내기도 했다.
하지만 개원 한 달여가 지난 20대 국회는 경제계의 이 같은 바람과는 정반대의 행보를 보이고 있다. 19대 국회가 폐기했던 경제민주화 법안들은 개원과 동시에 대거 ‘부활’했고 대기업들을 정조준한 법안도 다수 발의를 앞두고 있다. 경제활동과 관련한 정부 권한을 대폭 축소하면서까지 입법부의 영향력을 높이려는 법안들도 앞다퉈 발의되고 있다.
○ 경제민주화 법안 10건 중 6건은 ‘재활용’
동아일보가 5월 30일∼7월 6일 국회의원들이 입법 발의한 592개 법안 중 경제민주화 법안 67건과 19대 때 발의된 비슷한 법안들을 비교한 결과 40건(59.7%)은 표현만 살짝 바꾸거나 2, 3개 법안 내용을 묶어 발의한 ‘재활용’ 법안들인 것으로 분석됐다.
대규모 점포의 개설을 등록제에서 허가제로 변경하는 내용의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은 “대규모 점포가 주변 소상공인에게 ‘막대한’ 피해를 준다는 데서 그 기준이 모호하다”는 지적에도 20대 국회 개원과 함께 다시 등장했다. 삼성 등 대기업 지배구조를 타깃으로 삼은 공정거래법 개정안 역시 개원과 동시에 살아난 대표적 법안이다.
의원들의 재활용 사랑은 경제민주화 법안에만 해당하는 건 아니다. 경제활성화 법안도 총 40건 중 20건(50.0%)이 재탕 법안이었다. 경제민주화나 경제활성화로 구분할 수 없는 기타 법안들까지 합하면 경제 분야의 전체 의원 발의 법안 286건 중 재활용한 것으로 보이는 법안이 162건(56.6%)이나 됐다.
○ 정부 권한 축소하려는 법안도 잇달아 발의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최저임금법’ 개정안의 핵심은 최저임금의 결정을 국회에서 하겠다는 것이다. 최저임금은 현재 고용노동부 산하 최저임금위원회가 매년 심의하고 있다. 이 위원회는 노사정 3자가 각각 9명씩 추천해 구성한다. 정부 산하 위원회의 역할을 국회로 가져오겠다는 것은 입법부의 지나친 행정권 간섭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최저임금과 관련해 재계가 더 걱정하는 것은 국민의당의 행보다. 국민의당은 최근 당 홈페이지에서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부담을 하청업체와 개인 프랜차이즈 점포에 지게 하지 말고 대기업 본사에 일임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이런 내용을 담은 법안이 발의돼 국회를 통과한다면 재계는 당장 큰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이미 발의된 대중소기업상생협력촉진법 개정안(초과이익공유제 확산) 등과 맞물려 ‘기업 생태계’ 전체를 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중소기업에 대한 대기업 횡포를 근절하려면 공정거래법이나 하도급법 등 현재 있는 법안을 보다 철저히 집행하면 된다”며 “시장경제 자체를 흔드는 법안들을 고민 없이 내놓는 것은 국가 경제에 도움이 안 된다”고 우려했다.
최운열 더민주당 의원은 공정거래위원회의 ‘전속고발권’을 아예 폐지하기 위해 공정거래법, 하도급법 등 5개 법에 대한 개정안을 발의했다. 불공정거래나 담합 등에 대한 고발권을 전 국민으로 확대하자는 것이 핵심이다. 이미 19대 국회에서 감사원, 조달청, 중소기업청에 ‘고발요청권’을 부여하는 선에서 법안 개정이 이뤄졌지만 그에 만족할 수 없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고발로 이어지기 전 ‘정부 조사’라는 최소한의 장치도 없을 경우 경쟁 관계에 있는 협력업체들 사이에서 무분별한 투서가 날아들어 기업 생태계 전체를 흔들 수도 있다고 우려한다. 김정호 연세대 경제대학원 특임교수는 “일부 대기업의 횡포를 막기 위해 전체 대기업의 경제활동에 제약을 걸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비판했다.
○ 역대 최악이었던 19대보다는 나은 20대가 돼야
전문가들은 20대 국회가 최악의 입법 효율성을 보였던 19대 국회와는 달라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19대 국회의 의원 발의 법안 가결률은 39.6%로 집계됐다.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으로 일찍 해산한 4대(1958∼1960년·30.1%), 5대(1960∼1961년·20.3%) 국회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40%에도 미달했다.
의원 발의 법안 건수는 17대 6387건, 18대 1만2220건, 19대 1만6728건으로 매년 폭증하고 있지만 가결률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지난해는 의원 발의 법안 중 부결(2건)되거나 철회(172건) 및 폐기(9928건)된 법안이 1만 건을 넘어섰다.
이정희 한국외국어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시민·사회단체들이 의원들의 의정활동을 평가하기 시작하면서 발의 건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지만 ‘입법의 질’이 담보되지 않고 있다”며 “이는 각 정당 내 연구소가 법안이 시행되기 위해 필요한 예산이나 경제·사회적 영향에 대해 검토할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전경련 관계자는 “정부의 ‘규제 개혁’ 노력이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정치권부터 각종 규제를 양산하는 법안 발의에 신중을 기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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