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7년 초대 주미공사로 임명된 박정양(1841∼1904) 일행이 미국 워싱턴에 부임했을 때 일이다. 기이한 모자에 괴상한 도포 자락을 휘날리는 이들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난리법석이었다. 하루는 길을 걸어가는데 아이들이 돌을 던졌다. 경찰이 ‘외교 결례’를 범한 아이들을 붙잡아가자 이들은 서장을 만나 ‘아이들이 그럴 수도 있다’며 석방을 당부했다. 신문에 ‘한국에서 온 신사’란 미담 기사가 실리면서 구한말 외교사절의 관용이 워싱턴 외교가에서 화제가 됐다.
▷외교 의전에서 복장 규정이 빠질 리 없다. 초청장에 ‘화이트 타이’라고 적혀 있으면 최고 격식의 연미복과 흰색 나비넥타이를 매야 한다. ‘블랙 타이’(약식 야회복)는 검은색 턱시도에 검은 나비넥타이 차림을 뜻한다. 이 밖에 짙은 색 정장을 갖춰 입는 ‘라운지 슈트’(평복), 재킷은 필수지만 넥타이는 선택인 ‘비즈니스 캐주얼’ 같은 드레스코드가 있다.
▷옷차림으로 외교상 껄끄러운 논란이 빚어질 때도 있다. 1998년 일본을 방문한 장쩌민 당시 국가주석은 일왕 주최 만찬에 인민복 차림으로 참석해 일본 측이 반발했다. 최근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외교 문제가 아닌 옷 때문에 구설에 올랐다. 한미 양국이 사드 배치를 발표할 당시 백화점에서 옷 수선을 하고 새 양복까지 쇼핑을 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화급한 외교안보 사안이 발표되는 시점에, 그것도 평일 오전에 대한민국의 외교 수장은 꼭 백화점에 있어야 했을까.
▷외교부 해명인즉, 장관이 며칠 전 청사에서 넘어져 바지가 찢어졌는데 평소 아끼던 바지라서 수선차 들렀다는 것이다. 야당은 “굳이 장관이 직접 들고 백화점에 갈 만큼 한가한 상황이었는지, 열 번을 생각해도 납득하기 어려운 해명”이라고 꼬집었다. 어제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 출석한 윤 장관은 “오해를 살 소지가 있다는 것을 엄중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외교부 장관으로서 ‘옷을 못 입는다’는 입길에 오르내리는 것보다는 패셔니스타라는 말을 듣는 것이 낫겠지만 업무의 경중을 따지는 사리분별력은 옷 잘 입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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