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당 안철수 의원은 지난달 23일 독과점 시장구조를 개편하는 ‘독점 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발의했다. 법원이 독과점 사업자에게 주식 처분이나 주식 양도 등 강제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한 것이 핵심이다.
기존의 시정조치나 과징금 부과보다 규제를 훨씬 강화한 이 법안은 자유시장경쟁을 촉진한다는 게 장점으로 꼽힌다. 하지만 기업의 소유 구조를 강제로 바꾸는 것이어서 기업의 경영 활동과 고용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도 있다. 만약 이 법안이 정부입법으로 만들어졌다면 규제의 복합적 측면을 평가한 뒤 타당성이 인정된 경우에만 발의됐겠지만 의원입법인 탓에 이런 과정이 생략됐다.
○ 관리 사각지대에 놓인 의원입법
25일 김종석 새누리당 의원(여의도연구원장)이 한국규제학회와 함께 국회에서 개최한 ‘의원입법 규제영향평가 도입을 위한 정책 세미나’에선 의원입법을 통한 우회적인 규제 양산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20대 국회가 개원한 지 두 달도 채 안 됐지만 기업 부담을 크게 늘리는 규제 법안이 259건 쏟아졌다. 이 가운데에는 1997년에 폐지된 대형마트 허가제를 재도입하는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이나 공기업이 매년 채용 정원의 5%를 의무적으로 청년층으로 채우도록 강제하는 ‘청년고용촉진특별법’ 개정안, 장시간 근로를 막는다는 이유로 영세사업장의 사정을 감안하지 않은 채 사업자로 하여금 근로자의 출퇴근 시간을 의무적으로 측정하고 그 서류를 보존토록 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 등이 포함돼 있다.
규제 법안이 정부입법으로 발의되려면 3중의 규제 심사 등 까다로운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반면 의원입법은 이런 절차를 밟지 않는다. 지난해 국회법 개정 이후 ‘법안 비용 추계서’를 필수적으로 첨부해야 하지만 규제 심사는 받지 않아도 된다.
정부가 규제개혁신문고, 규제개혁장관회의, 무역투자진흥회의,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등을 통해 규제를 없애려 노력하지만 의원입법으로 새로운 규제가 우후죽순처럼 솟아나기 때문에 기업들의 규제 개혁 체감도는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정부가 네거티브 규제 방식(최소한의 금지 사항 이외에는 모두 허용)을 도입한다고 해도 의원입법을 통한 규제 양산을 막지 못하면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통제받지 않는 의원입법은 ‘청부 입법’의 주 원인이기도 하다. 정부 부처들은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하는 정부입법 대신 의원실을 통해 법안을 발의하는 일이 적지 않다. 19대 국회가 한창이던 2013년 5월 미래창조과학부가 새누리당 조해진 의원을 통해 ‘이동통신단말장치 유통구조 개선에 관한 법안’을 발의한 게 대표적이다. 이 법안에는 이동통신사의 보조금뿐만 아니라 휴대전화 제조사가 판매점에 제공하는 보조금까지 규제하는 내용이 들어있어 과잉 입법이란 비판이 많았다.
정부 관계자는 “아직은 20대 국회 초반이라 움직임이 별로 나타나지 않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청부 입법 사례가 많아질 것”이라며 “야당의 힘이 커진 만큼 야당발 청부 입법이 기승을 부릴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 규제심사 국회 거부감 줄이는 게 관건
의원입법을 통한 규제 양산을 막기 위해선 의원입법에 대해서도 정부입법에 준하는 규제영향평가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많다. 19대 국회에선 새누리당 이한구 의원이 의원입법에도 정부입법처럼 규제영향평가제도를 도입하는 내용이 담긴 국회법 개정안을 발의한 바 있다. 법안 발의 단계에서 규제사전검토서를 첨부하고, 소관 상임위원회가 심사할 때 규제영향평가를 실시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상당수 국회의원이 입법권 침해 우려가 있다며 반발해 이 의원의 개정안은 제대로 논의조차 하지 못한 채 19대 국회가 문을 닫으면서 자동 폐기됐다.
정부는 의원입법을 통한 규제 양산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지만 삼권분립을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소극적이다. 국무조정실은 올해 초 규제정비종합계획을 마련하면서 의원입법에 대한 다양한 개선 방안을 검토했지만 국회의 반발을 의식해 최종 계획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후 정부는 국회가 다시 한 번 국회법 개정안을 발의하면 통과에 전력을 다하겠다며 국회에서 먼저 논의의 물꼬를 틔워 주길 기대하고 있다. 현재 새누리당 김종석 의원이 의견수렴 절차를 거쳐 국회법 개정안 발의를 계획하고 있다. 김 의원은 “규제심사제도의 미비로 인한 과잉 불량 규제의 도입은 국민생활과 국민경제에 큰 부담과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규제영향평가 제도 도입에 대한 의원들의 거부감이 큰 만큼 행정부 개입을 최소화하면서 국회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규제심사제도를 설계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우선 국회 입법조사처나 예산정책처가 정부의 ‘규제 비용 자동 전산 시스템’을 활용해 의원입법이 발생시키는 규제 비용을 계산한 뒤 이를 기업과 국민에게 공표하는 방식을 제시했다. 또 예산결산특별위원회와 유사하게 국회 내부에 규제개혁특별위원회를 설치하는 방안도 검토해 볼 만하다고 강조했다.
최정인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의원입법에 대한 규제영향평가를 도입하더라도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선 국회가 결정하는 것이 맞다”며 “규제영향평가는 법안 심의과정을 좀 더 충실하게 만드는 기초 자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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