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 국왕들은 불교 문제로 유신(儒臣)들과 언쟁을 벌이곤 했다. 성리학자였던 신진사대부 세력을 주축으로 건국된 조선의 척불(斥佛)정책과 왕실 신앙이었던 불교가 충돌하는 지점이었다. 역사학자 임용한의 저서 ‘조선국왕 이야기’는 국왕의 특성에 따른 대응법의 차이를 비교했다.
왜 ‘부패’란 단어 썼나
‘훌륭한 무장이었지만 학문이 부족했던 태조’는 고려 말 문신이자 뛰어난 성리학자였던 목은(牧隱) 이색을 들먹이며 효과적으로 제압한다. “이색도 불교를 믿었다. 네가 이색보다 잘났느냐.” ‘술수를 좋아했던 태종’은 절묘한 핑계로 빠져나간다. “나도 불교가 허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중국이 불교를 신봉하고 있으니 우리가 탄압할 수는 없다.” ‘터프가이를 지향했던 세조’는 단순명료(?)했다. “칼을 가져와라. 내 저놈을 죽여 부처께 사죄하겠다.”
세종 때는 훈민정음 창제 반대 상소가 빗발쳤다. 최만리가 ‘자기 문자를 가진 나라는 모두 오랑캐’라며 차라리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한 이두(吏讀)를 써야 한다고 상소했다. 신하들보다 학문이 뛰어났던 세종은 학문으로 기를 죽였다. “네가 음운학에 대해 알기나 하느냐.”
독립적인 언론이 없던 조선에선 중신들이 언관(言官)의 역할을 겸했다. 지금이야 조선 같은 왕정은 아니지만 언론의 비판을 접한 대통령의 대응법에 따라 그릇의 크기가 짐작된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임기 2년 차인 2004년 1월 연두기자회견에서 ‘보수언론과의 전쟁’을 선언했다. 급기야 임기 말엔 기자실 폐쇄의 대못까지 박았다. 그런데 보수정권인 박근혜 정부에서 ‘일부 보수언론’에 대해 노무현 정권 때 못지않은 성토가 나올 줄은 몰랐다.
청와대 관계자는 21일 “우병우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에 대한 첫 의혹 보도 이후 일부 언론 등 부패기득권세력과 좌파세력이 ‘우병우 죽이기’에 나섰다”며 “우병우 죽이기의 본질은 집권 후반기 대통령과 정권을 흔들어 식물정부를 만들겠다는 의도”라고 말했다. ‘일부 언론’이 친박 세력으로는 보수정권 재창출이 어렵다고 보고, 정권 재창출 세력을 교체하기 위해 대통령 흔들기에 나섰다는 뜻이다.
‘일부 언론 등 부패기득권세력’은 우 수석의 1300억 원대 처가 강남 땅 거래 개입 의혹을 처음 보도한 A신문을 지칭하는 듯하다. 그런데 ‘부패’란 단어가 묘하다. 청와대 관계자가 밑도 끝도 없이 이런 말을 했을까, 하는 의구심 때문에 파장이 번지는 것이다. 청와대에선 A신문 자회사인 종합편성채널이 ‘박근혜 정부 들어 건립된 B문화재단과 C체육재단에 대기업들이 900억 원에 가까운 출연금을 내는 데 청와대 인사가 개입했다’는 의혹을 연속 보도하는 것까지 ‘정권 흔들기’로 받아들인다.
‘우병우 살리기’가 정권 흔들어
‘우병우 죽이기=대통령 흔들기’라는 청와대의 인식이 딱하다. 과도한 ‘우병우 살리기’가 정권을 흔드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감찰 결과 누설 의혹을 받고 있는 이석수 특별감찰관은 사퇴 여부를 묻는 질문에 “의혹만으로는 사퇴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 정부 방침 아닙니까”라며 우병우 비호를 사실상 조롱했다. 새누리당 정진석 원내대표는 “국민 입장에서 보면 대통령은 자신의 권한을 잠시 맡겨둔 대리인에 불과하다”고 했다. 지당한 말씀이지만, 대통령이 임명했거나 우군이던 인사들의 입에서 더 험한 소리를 듣지 않았으면 한다. 그러려면 대통령이 ‘읍참(泣斬) 우병우’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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