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23일 청와대 안가에서 새누리당 지도부와 ‘번개 저녁’을 하던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안상수 당시 한나라당 대표에게 막걸리를 따라주며 싸늘하게 던진 말이다. 13일 전 안 대표가 최고위원회의 도중 정동기 감사원장 후보자의 자진사퇴를 촉구한 것을 겨냥한 것이다. 정 후보자는 변호사 시절 고액 수임료 문제 등으로 여론이 악화된 상황에서 여당 대표의 사퇴 촉구까지 받게 되자 이틀 만에 물러났다. “당신 많이 컸네”는 여당 대표의 직언을 ‘선상반란’으로 여겼던 대통령의 분노와 서운함이 묻어나는 대목이었다.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가 취임 첫날 “대통령과 맞서고 정부와 맞서는 것이 정의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면 여당 소속 의원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했을 때 적잖은 비판이 있었다. 하지만 안상수 대표를 면박 줬던 이명박 대통령의 예에 비춰볼 때 박근혜 대통령의 비서 출신인 이 대표가 ‘감히’ 직언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은 애초 무리일 수 있다. 이 대표가 대표 당선 직후 기자간담회에서 “청와대와 정부가 민심과 괴리가 있다면 누구보다 대통령, 청와대, 정부에 신속·정확하게 전달하겠다”고 했을 때도 반신반의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랬던 이 대표가 우병우 대통령민정수석의 거취 문제 해결에 나서 달라는 당내의 점증하는 요구에 ‘바람론’을 들고 나왔다. “벼가 익고 과일이 익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해와 구름, 비만 있어서는 되는 것이 아니다. 때론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도 역할을 한다”(24일 최고위원·중진의원 연석회의)는 것이다. 공개적으론 말을 아끼고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우 수석이 물러날 수밖에 없다는 여론을 전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 직언이라는 약이 너무 써서 대통령이 들이켜기 어렵다면 조용히 시중 여론을 전달함으로써 우병우의 위기가 대통령의 위기로, 국정의 위기로 번지는 것을 막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대표는 대표 수락 연설에서 “특권과 기득권, 권위주의는 타파의 대상이 될지언정 우리 주위에는 머물지 못할(못하게 할) 것”이라고 했다. 검찰 경찰 국가정보원 국세청 감사원 등 5대 사정기관을 총괄하는 민정수석이 현직을 유지하면서 검찰 수사를 받는 것과 같은 특혜가 또 있을까. 김대중 정부 시절 금품 수수 의혹을 받은 신광옥 민정수석이나 옷 로비 사건에 연루된 박주선 법무비서관은 (비록 나중에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사표를 쓰고 검찰 조사를 받았다. 우 수석이 국민의 상식이나 전례에 어긋나게 민정수석 자리를 유지하면서 검찰 조사를 받는 일이 박근혜 정부에서 처음으로 벌어진다면 특권과 기득권을 타파하겠다는 이 대표의 다짐도, 벼를 익히는 바람 역할을 하고 있다는 소리도 말짱 허언(虛言)이 되고 말 것이다.
이 대표는 지난 주말 “땀내 나는 사람 땀내 나게 찾겠다”며 가두리 양식장으로, 소방서와 경찰서로 뛰어다녔다. 민생 현장을 살피는 것이야 뭐라 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여당 대표가 당내 대선주자들은 물론이고 주류 친박(친박근혜)계의 지지로 뽑힌 원내대표까지 해결을 요구하고 있는 정국 현안에 입을 닫은 채 민생만 외치는 것은 책임 회피로 비칠 수 있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둘러싸고 주민들이 반발하고 있는 성주나 김천을 방문해 설득 노력을 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청와대가 우 수석 사퇴론을 ‘일부 언론 등 부패 기득권 세력과 좌파 세력의 식물정부 만들기’로 싸잡아 역공하며 이전투구를 벌이는데도 ‘이정현의 바람’은 대체 어디로 불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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