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늘 예산안을 수억 원 단위까지 빠듯하게 짰다고 주장한다. 그런데도 국회의원들이 지역구 민원사업으로 수백억 원 규모의 예산을 끊임없이 반영하는 국가예산 체계는 미스터리다. 몇몇 재정사업을 줄여 짜낸 돈만으로 지역구에 ‘예산 폭탄’을 터뜨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딘가에 국민 모르는 비상금이 따로 있다는 얘기다. 누가 어떻게 만든 비상금인가. 국회서 깎일 사업 미리 반영
기획재정부가 공식 발표하는 예산안에는 재정사업마다 소요금액이 적혀 있다. 이 금액을 다 합친 새해 예산안이 400조7000억 원이다.
하지만 기재부는 일부 사업에서 비공식적인 소요금액을 하나 더 가지고 있다. 국회 심사 과정에서 사업 규모가 깎일 것이라고 보고 잠정적으로 정해둔 또 하나의 예산안이다. 예산 편성 단계에서 뻥튀기해 놓은 사업을 국회에서 감액하면 그 남는 돈을 의원들의 쪽지예산 사업에 바치려는 의도다. 예산안이 공식장부라면 쪽지사업을 위한 예산안은 비밀장부인 셈이다.
기재부의 비밀장부에는 현 정부가 역점사업으로 치지 않는 주변부 사업, 국민 실생활에 직접 영향을 주진 않지만 규모가 워낙 커서 좀 줄여도 표시가 잘 나지 않는 금융사업이 감액 우선순위에 올라 있다.
국회의원들은 정부 예산안이 국회에 제출돼 소관 부처별 상임위원회와 예산결산특별위원회로 넘어오면 주변부 사업부터 뜯어내기 시작한다. 너무 독하게 뜯어내 감액 규모가 당초 예상한 한도를 넘어설 때만 기재부가 나서서 조정한다.
금융사업을 감액할 때는 기재부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 의원들은 이런 사업이 뭔지 알기 어렵고, 후폭풍을 감당할 수 없으니 마음대로 줄일 수도 없다. ‘국채이자 상환자금’이 대표적이다. 어려운 용어만 들어도 질리지 않나. 그래서 관중인 국민은 눈감기 쉽고 플레이어인 정치권과 정부는 코 베어가기 좋다.
한국이 재정 부족분을 충당하려고 발행하는 국채는 내년 말 기준 350조 원(외국환평형기금채권 제외)이다. 이 국채를 산 쪽에 줘야 할 이자가 내년에만 12조5000억 원이다. 기재부는 신규로 발행할 국채 28조 원에 대한 이자율을 연 2.3%로 정해두고 있다. 이미 발행한 국채 322조 원에 대한 이자율은 연 3∼4%대다. 이자율을 조금 내리면 수천억 원의 여윳돈, 즉 국회의원을 위한 쪽지예산 자금이 생긴다.
이런 식의 금리 짬짜미는 과거에도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미국이 금리를 올리려고 하는 비상시다. 그런데도 국채이자 상환 금리를 임의로 조정한다면 국민을 바보로 아는 것이다.
기재부와 정치권의 유착 끊어야
쪽지예산안이 공식예산안에 숨어 있는 구조는 기재부가 정치권과 한통속임을 보여준다. 역대 기재부 예산 라인의 주요 보직 간부들이 실력 이외의 변수 덕분에 그 자리를 꿰찰 수 있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예산시즌만 되면 기재부와 정치권 사이에 경제 현안에 대한 논의는 사라지고 예산을 어떻게 쪼개 나눠 가질지만 남는다. 이런 거래의 결과물로 지역구 의원들은 예산 폭탄을 ‘뇌물’로 받고, 국민 세금으로 인심 쓴 기재부 관료들은 영전한다.
쪽지예산만 아니었다면 내년 예산안은 400조 원대를 넘기지 않았을 수도 있다.
부당한 ‘예산 거래’는 재정건전성을 떨어뜨린다. 그 결과 정부는 재정 부실을 감추려 하고, 재정 중독증에 빠진 가계와 기업은 눈을 가린 채 빚으로 잔치를 벌인다. 재정위기를 겪은 국가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늘 공무원과 정치권의 유착이 있었다. 국가예산 편성과 심사 체계를 더이상 장막 뒤에 방치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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