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속 땜빵 뒷북…. 정부 정책은 대부분 이런 식이다. 대통령이 누구든 정부가 내놓는 정책은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를 못했다. 길게 돌아볼 필요도 없다. 당장 전 세계 바다 위에서 벌어지는 한진해운 사태를 보면 알 수 있다. 철 지난 예능 프로그램 재방송처럼 반복되는 법조비리 대책도 마찬가지다. 돌다리 두들기듯 오랫동안 신중한 검토와 준비를 거쳐 시행한 정책을 찾아보기 힘든 게 현실이다.
하지만 20년 가깝게 공을 들인 뒤 시행한 정책이 있다. 이 정책은 1996년 논의가 시작돼 10년 후인 2006년 관련법이 만들어졌다. 시행은 이로부터 8년 후인 2014년에 이뤄졌다. 첫 논의부터 시행까지 18년이 걸렸다. 추진 기간만 놓고 보면 역대 정부 정책 중 ‘국보급’이다.
18년 산고(産苦)의 결실은 바로 ‘도로명주소’ 사업이다. 2014년 1월 본격적으로 시행됐으니 벌써 만 3년을 앞두고 있다. 그래서 박근혜 정부의 정책으로 아는 사람도 많지만 실제 추진 역사는 이처럼 오래됐다. 시작은 김영삼 정부 때였다. 당시 청와대 정책 추진 과제로 기존 지번주소 체계의 개편이 다뤄졌다. 이어 김대중 정부를 거쳐 노무현 정부 때인 2006년 10월 ‘도로명주소법’이 제정됐다. 이명박 정부 때인 2011년 지번주소와 도로명주소의 병행 사용이 시작됐다.
하지만 오랜 추진 기간이 정책의 질까지 담보하진 못한 것 같다. 여전히 도로명주소를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경기연구원이 올 7월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지번주소에 비해 도로명주소가 불편하다는 의견이 56%를 넘었다. 실생활에서 도로명주소만 사용하고 있다는 사람은 10명 중 2명도 안 됐다(약 18%). 특히 지금 사는 집의 도로명주소를 알고 있다는 응답은 58%였다. 바꿔 말하면 10명 중 4, 5명은 자신의 집주소조차 모른 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설문조사 결과까지 찾아볼 필요도 없다. 과거 집주소를 물어보면 바로 답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스마트폰만 바라보고 있다. 인터넷에서 홈페이지에 가입하거나 쇼핑을 할 때 지번주소와 도로명주소를 선택하라는 안내도 짜증스럽다. 정부와 전문가들은 ‘공식’만 외우면 편하다고 하는데 아무리 들여다봐도 어지간한 수학 공식보다 어렵다. 내가 문과 출신이라 그런지 아니면 나이가 들어 두뇌 기능이 떨어진 건지 고민이 들 정도다. 아직도 이렇게 낯설기만 한데 최근 3년간(병행 사용 기간 포함) 민원 등의 이유로 바뀐 도로명주소는 300건 가까이나 된다.
1918년 도입된 지번주소의 역사는 100년에 이른다. 암기 능력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몸에 밴 주소 체계다. 그래서 도로명주소가 익숙해지는 데 100년이 걸릴 거라고 말하는 전문가도 있다. 그러나 도로명주소가 이렇게 오래 생명을 유지할지도 의문이다. 처음 아이디어가 나온 건 스마트폰은커녕 내비게이션도 흔치 않던 때다(참고로 애플의 아이폰이 2007년 개발됐고 국내에는 2009년 처음 출시됐다). 이제 스마트폰 한 대면 걸리는 시간까지 계산해 목적지를 찾아갈 수 있다. 쪽지 한 장 들고 집 찾아가던 시절에 나온 아이디어가 18년 후 현실이 될 때까지 과연 공무원들은 이런 변화를 예측은커녕 감안이나 했을지 궁금하다.
지금까지 도로명주소 시행에 들어간 정부와 지자체 예산은 약 4000억 원이라고 한다. 여기에 민간부문 비용과 국민들이 겪고 있는 ‘불편 비용’은 빠져 있다. 100년이 아니라 당장 20∼30년 뒤에 어떤 첨단기술이 등장할지 모르는데 도로명주소 사용을 고집하는 게 과연 타당할까. ‘그건 다음 세대가 고민할 일’이라며 밀어붙인 정책의 대가가 어떤 것일지 가늠조차 안 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