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진영은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일 것이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내년 1월 중순 이전에 귀국하겠다고 밝히면서다. 정치권에선 반 총장의 대선 출마를 공식화하는 분위기다. 대선 출마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것은 긍정의 의미가 담긴 외교적 언사의 전형이다. 보는 이들은 답답할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어떻게 명확하게 얘기하느냐’며 반 총장이 더 답답해할지도 모른다.
보수 진영은 고민이 깊다. 만나는 이들마다 “내년 대선에서 정권 재창출이 가능하겠느냐”고 묻는다. 보수 집권 9년 동안 보수를 지탱해온 거대한 신화가 무너진 데 따른 초조함 때문이다. 보수는 부패했을지언정 유능하다는 신화 말이다. 그래도 경제를 살릴 것이라는 기대, 튼튼한 안보를 지켜낼 것이란 믿음이 시나브로 무너졌다. 악화 일로의 민생경제와 북한 김정은의 ‘광란의 핵 질주’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백성은 항심(恒心)을 잃었고, 군사는 장부에만 기록돼 있다. 안으로는 재정이 바닥났고, 밖으로는 변란이 잇따르고 있다. 선비들의 공론은 분열됐고, 기강은 무너졌다.’ 율곡 이이가 1583년 선조에게 올린 상소문의 한 대목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9년 전이다. 전쟁을 일으킨 왜적과 백성이 짓밟혀도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조선 중 국민 입장에선 어느 쪽을 더 원망할까.
2016년 대한민국은 어떤가. 백성은 ‘헬조선(지옥 같은 한국)’을 입에 달고 산다. 방산 비리는 더 이상 뉴스도 아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재정적자와 가계부채는 핵폭탄 못지않게 무섭다. 일자리 없는 청년들은 언제 거리로 뛰쳐나올지 모른다. 강대국의 이권 다툼에 한국은 바람 앞 촛불 신세다. 국회는 국론 통합은커녕 국가 퇴행의 진원지다. 이 모든 게 보수 정권의 책임은 아니다. 그렇다고 보수 집권 기간 나아진 것도 없다.
그렇다면 보수 진영의 질문은 한참 엇나갔다. “보수가 내년 대선에서 이길 수 있느냐”는 염치없는 질문이다. 보다 본질적 물음에 답해야 한다. “과연 보수의 재집권은 정당하냐”가 그것이다. ‘이길 수 있느냐’와 ‘이기는 게 옳으냐’는 답만 다른 게 아니다. 답을 구하는 과정 자체가 전혀 다르다.
이길 수 있느냐는 ‘기술’의 영역이다. 흔히 대선은 인물과 구도, 바람(또는 정책)이 좌우한다고 말한다. 가뜩이나 인물이 없는 보수 진영에 반 총장은 분명 축복이다. 어느 후보보다 인생 스토리가 남다르다.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 팬클럽이 생겨나고, 정치적 때가 묻지 않은 것도 확장성 측면에서 나쁘지 않다. 여기에 고령화로 보수 성향 유권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포기하지 않을 것 같은’ 안철수로 야권 표가 분산될 가능성도 있다.
‘보수가 이길 수 있느냐’는 질문만 놓고 보면 내년 대선은 해볼 만한 게임일지 모른다. 이런 선거 공학 전문가를 옆에 끼고 있다면 보수는 백전백패다. 인물이니, 구도니, 판세니 하는 말은 여의도에서나 통용되는 외계어다. 4·13총선에서 그렇게 호되게 당하고도 모르겠는가. 국민은 지금 전혀 다른 질문을 하고 있다.
‘보수의 재집권은 정당한가’에 답하려면 치열한 가치 논쟁이 필수다. 그런 점에서 남경필 경기도지사의 모병제 공개토론 제안은 의미가 있다. 모병제는 여러 정책 대안 중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여기엔 남 지사의 가치가 담겼다. 모병제로 흙수저 출신 청년들에게 사회 진출의 사다리를 놓겠다는 포부를 실었다.
이를 두고 새누리당 유승민 의원은 ‘정의롭지 못하다’고 했다. 이 또한 유 의원의 가치다. 그렇다면 정의를 실현할 구체적 방법은 무엇인지 유 의원이 답해야 한다. 이런 가치 논쟁 속에서 남경필이, 유승민이, 그리고 보수 후보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국가란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내놓아야 한다. 이게 ‘보수의 재집권은 정당하냐’는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첫 과정이다.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는 ‘어젠다 2035’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올해 태어난 아이가 처음 투표권을 갖는 게 2035년이다. 이 대표는 이들이 첫 투표에서 새누리당을 찍도록 만들겠다고 했다. 무모하면서도 원대한 포부다. 이를 위해 보육과 교육, 일자리 문제 등을 해결할 장기 비전을 내놓겠다는 것이다. ‘어젠다 2035’라는 틀 속에 보수 후보들의 가치를 어떻게 녹여낼 수 있느냐가 ‘보수 재집권의 정당성’을 가늠할 잣대가 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한마디로 응축하면 ‘아이를 낳지 않는 사회’가 아닐까.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부어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쯤 되면 단순히 정책 차원의 문제가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궁극적으로 저출산은 ‘물려줄 희망’이 없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과연 보수는 다시 희망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답을 찾아 나설 때 비로소 재집권의 문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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