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허업(虛業)이다.” 김종필(JP·90) 전 국무총리의 이 말은 곱씹을수록 멋지다. 서른다섯이라는 나이에 군사정변을 기획해 정권을 잡았지만 ‘자의 반 타의 반’의 길을 걸어야 했던 ‘2인자’, ‘3김’의 반열에 올라 평생 한국 정치를 쥐락펴락했지만 유일하게 대통령이 되지 못한 그가 한 말이기에 더 깊은 여운을 남긴다.
JP ‘훈수정치’ 내려놓기를…
말로는 ‘허업’이라면서도 아흔 살이 돼서도 정치를 놓을 수 없는 것이 노정객(老政客)의 본능일까. 이달 여야 원내대표단이 미국을 방문하기 전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자택을 찾았을 때 기력이 쇠한 JP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정 원내대표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만날 예정’이라고 하자 “반 총장을 만난다고?”라며 비로소 고개를 들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가서 전해. 유종지미(有終之美) 거두시라고. 돌아오셔서 뜻 세우신 대로 하시되, 이를 악물고 하시라고. 내가 비록 힘은 없지만 마지막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돕겠다고….”
지난해 부인 박영옥 여사가 타계했을 때 그가 보여준 ‘빈소(殯所) 정치’는 오로지 JP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개인적으로는 구순의 JP가 이제는 ‘훈수 정치’마저도 놓았으면 한다. 휠체어에 탄 채로 골프를 칠 정도로 골프 사랑이 유별난 그가 다시 라운딩에 나설 만큼 건강을 회복하길 바란다.
노쇠한 JP가 고개를 드는 것처럼 정권 재창출 기대를 사실상 접었던 보수 유권자들도 ‘반기문’이라는 이름에 활력을 되찾고 있다. 반 총장이 여야 원내대표단에 ‘내년 1월 초순에 귀국해 국민께 귀국보고를 할 기회가 있으면 영광’이라고 말한 것이 알려지자 ‘귀국보고회=대선 출정식’으로 여겨지는 분위기다.
5월 반 총장이 방한해 대선 출마를 시사하자 관가에서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정권교체를 내다보고 술렁이던 관료들의 동요가 잠잠해진 것이다. 늘 그렇듯, 집권 4년 차에는 관료들의 ‘줄 대기’가 본격화한다. 정치부 기자 시절 유력 대선주자 캠프를 취재하다가 얼굴을 아는 관료들을 마주쳐 어색했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청와대 파견 관료는 갖은 핑계를 대며 ‘원대 복귀’하려 한다. 그런데 여권 주자 중에 유력한 미래권력이 안 보인다면 이들의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특히 줄 대기에 가장 민첩한 곳은 검찰과 경찰, 군(軍)과 국가정보원, 국세청 등 권력기관이다. 권력의 향배에 따라 고위직의 운명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도 있다. 5월 이후 권력기관의 동요 또한 잠잠해졌다. 기실 박근혜 대통령이 반 총장에게 가장 고마워해야 할 대목이다. 올 초부터 권력기관의 물밑에선 야권 유력 주자인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에게 선을 대려는 움직임이 꿈틀거렸다. 아직 대선 출마도 불확실한, 이역만리의 반 총장이 한국의 관료사회를 잠재우는, 권력이란 그런 것이다. 관료 출신 반 총장도 이를 모를 리 없다.
귀국보고회가 대선 출정식?
그렇다면 반기문은 과연 JP의 표현대로 ‘이를 악물고’ 뛸 수 있을까. 야권에서는 이미 노무현 대통령 때 사무총장에 오른 반 총장과 노 전 대통령의 측근 박연차의 연루설을 흘리는 등 검증 리스트를 준비하고 있다. 이 점에서 반 총장이 방한 때 남긴 “국가 통합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는 말이 심상찮게 들린다. 이미 ‘너무 많은 것’을 가진 반기문. 과연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을까. 내년 대선의 향배를 가를 물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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