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간 극한 대치로 몸살을 앓은 정치권에서 개헌 논의가 다시 힘을 받고 있다. ‘벼랑 끝 대치’가 따지고 보면 내년 대선을 위한 전초전이었던 데다, 현재의 권력구조를 바꾸지 않고선 이 같은 상황이 반복될 것이라는 지적 때문이다. 특히 여권 주류인 친박(친박근혜)계도 개헌론에 군불을 지피면서 청와대의 기류 변화를 반영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 여야에 봇물 터지는 개헌 움직임
헌법학자 출신으로 대표적인 ‘진박(진짜 친박)’ 인사인 새누리당 정종섭 의원은 이달 12일경 자신이 주도하는 ‘국가혁신을 위한 연구모임’에서 원내외 개헌론자들을 모아 개헌론에 불을 지필 예정이다. 그는 3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전직 국회의장과 개헌에 적극적인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전 비상대책위원회 대표, 여야 대선주자 등을 초청해 라운드테이블을 열 계획”이라며 “내년 초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를 목표로 지속적으로 개헌을 공론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야권에선 김종인 전 대표가 연일 개헌론을 띄우고 있다. 의원내각제로의 개헌과 임기 단축(21대 총선을 치르는 2020년 4월까지 2년 3개월)을 공약으로 내거는 사람이 차기 대통령이 돼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김 전 대표는 정종섭 의원을 비롯해 남경필 경기도지사, 정의화 전 국회의장,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 등 여야를 아우르며 폭넓게 의견 교환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 의원은 김 전 대표에 대해 “개헌에 대한 생각이 95% 일치한다”고도 말했다.
국회 파행 속에 잠시 주춤했던 원내외 개헌 추진 움직임도 다시 시동을 걸고 있다. 여야 의원 185명으로 출발한 ‘20대 국회 개헌 추진 국회의원 모임’은 조만간 ‘개헌선’인 의원 200명의 모집을 마친 뒤 명단을 공개하고 활동을 시작할 예정이다. 지난달 23일 창립대회를 연 ‘나라 살리는 헌법 개정 국민주권회의’도 외곽에서 ‘개헌 압박’을 높여갈 예정이다. 이 모임에는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부의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 핵심 인사인 이재오 전 의원도 개헌을 내세우고 ‘늘푸른한국당’ 창당에 속도를 내고 있다.
○ 개헌 열쇠 쥔 청와대 기류는
그동안 여권 주류에서 개헌은 금기어에 가까웠다. 2014년 10월 새누리당 김무성 전 대표가 “개헌 논의가 봇물 터질 것”이라고 했다가 청와대로부터 된서리를 맞은 탓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당시 “개헌은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라고 잘라 말했다. 하지만 2년 새 양상이 확연히 달라졌다. 개헌 추진 세력이 수적으로 늘어난 데다 ‘제3지대론’을 펴는 인사들뿐만 아니라 여권 주류 일부도 가세한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정치권에서는 정 의원의 움직임을 놓고 내년 대선에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외에 뚜렷한 주자를 찾지 못한 여권 주류가 권력구조 개편 논의를 더 이상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할 수 없기 때문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친박계의 한 핵심 의원은 “정 의원의 행보가 박 대통령과의 교감 속에 이뤄진 건 꼭 아니라 하더라도 친박으로서도 나쁠 게 없다고 보고 있다”며 “청와대도 정치권의 움직임에 물밑 검토는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청와대는 여전히 개헌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은 피하고 있다. 청와대의 한 참모는 “민생과 경제 회복, 북핵 대응, 4대 개혁 등에 매진해야 할 때라는 박 대통령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다만 개헌론에 대한 박 대통령의 거부감이 예전보다 덜할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한 여권 관계자는 “박 대통령의 ‘개헌 블랙홀’ 발언은 임기 초·중반에 국정과제를 빨리 진행해야 하는 시점에서 개헌론이 불거지는 것을 막기 위한 측면이 컸다”고 말했다. 정 의원도 “여야가 경제활성화법 처리와 공공개혁 추진에 대한 공감대를 마련하면 박 대통령이 개헌 논의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