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국회에서 소수 여당으로 전락한 새누리당이 의회권력을 쥔 야당에 대항하기 위해 국회선진화법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2012년 국회법 개정으로 선진화법이 도입된 뒤 ‘야당의 전유물’처럼 이용됐던 것과 비교하면 격세지감(隔世之感)이다. 여야 가릴 것 없이 다수당의 독주를 막는다며 선진화법에 기대고 있지만 ‘협치(協治)’의 모습은 요원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20대 국회 첫 정기국회 예산 정국에서 선진화법으로 여야 간 ‘대폭발’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다.
○ 선진화법은 전가(傳家)의 보도(寶刀)
새누리당은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선진화법의 덕(?)을 톡톡히 봤다. 교문위는 재적 위원 29명 가운데 야당이 16명으로 절반을 넘는다. 그러나 야당은 미르·K스포츠 재단 의혹과 관련된 최순실 씨(최서원으로 개명), CF 감독 차은택 씨(전 문화창조융합본부 단장), 안종범 대통령정책조정수석비서관, 이승철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 중 단 한 명도 증인으로 채택하지 못했다. 새누리당이 증인 채택 안건을 국회법 57조 2항에 따라 안건조정위원회 조정 신청을 했기 때문이다. 상임위 위원 3분의 1만으로 안건 채택을 최장 90일간 미룰 수 있다는 점을 노린 것이다. 교문위 새누리당 간사인 염동열 의원은 6일 국감에서 “선진화법에 안건조정위원회라는 제도가 있다”며 “소수의 생각도 충분하게 협치를 하고 의회에서 활용할 수 있는 시스템”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19대 국회 때 야당이 선진화법을 활용한 대표적 사례는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다. 필리버스터는 선진화법으로 43년 만에 부활했다. 올해 2월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은 과반을 차지하고 있던 새누리당의 테러방지법 단독 처리를 막기 위해 본회의장에서 192시간 25분 동안 필리버스터를 했다. 여야 간 이견이 있는 쟁점 법안의 처리를 위해 ‘5분의 3 찬성’이 필요하도록 하는 조항이 ‘법안 연계 전략’의 단골 무기가 된 셈이다.
○ 달라진 선진화법 인식…예산 정국 뇌관 터지나
새누리당은 선진화법으로 야당을 상대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정진석 원내대표는 9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선진화법 개정은 지금 논의할 단계가 아니다. 강경 대치가 불가피하더라도 야당이 숫자로 밀어붙이겠다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다수당이었던 19대 당시 “선진화법은 망국법”이라며 개정을 추진했던 것과는 달라진 모습이다.
우월적 지위를 가진 야당은 선진화법에 답답해하는 분위기다. 다만 선진화법 개정에는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더민주당 우상호 원내대표는 이날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선진화법 개정은 전혀 검토하지 않고 있다”며 “몸싸움 같은 물리적 충돌을 막는 효과가 있다”고만 말했다. 선진화법의 혜택을 받았던 더민주당이 ‘여소야대’로 상황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선진화법 개정에 나서면 역풍에 휘말릴 수 있다는 우려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국민의당 김관영 원내수석부대표는 이날 “증인 채택 안건까지 안건조정위에 넘기는 것은 지나치다”며 “당내에는 개정 목소리가 많다”고 했다. 이에 앞서 8월 박지원 비상대책위원장 겸 원내대표도 “식물국회보다 동물국회로 돌아가는 게 바람직하다”며 개정 필요성을 시사했다.
이에 따라 연말 예산 정국이 다시 선진화법의 시험대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선진화법엔 매년 11월 30일까지 여야가 예산안 심사를 마치지 못하면 그 다음 날 본회의에 자동 부의하도록 돼 있다. 여야 이견으로 정부 예산안이 본회의에 자동 부의되더라도 다수를 차지한 야당이 부결시키거나 야당 단독으로 수정안을 제출해 처리할 수 있다. 더민주당 출신 정세균 국회의장이 여당의 반대에도 법인세 인상 법안 등을 포함한 예산부수법안을 직권 상정할 수도 있다. 이미 정기국회 개회사와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해임건의안 처리로 갈등의 골이 깊어진 정 의장과 새누리당, 야당 간 갈등이 다시 불거질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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