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야, 문제는 정치다’도 틀렸고 ‘바보야, 문제는 경제다’도 틀렸다. 지금 우리나라는 돈 많고 지위 높은 상류층이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 oblige·높은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외면하기 때문에 선진국 문턱에서 좌절한 것이라고 원로 사회학자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79)가 일갈했다.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저서 ‘특혜와 책임’을 통해서다.
역사의 동력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뿐
모든 국민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매달릴 필요도 없다. 상층(上層), 즉 부를 생산하는 기업가와 자원을 배분하는 고위직이 문제라고 송 교수는 지적했다. 고위직도 위세 고위직과 위신 고위직으로 나뉜다. 위세 고위직은 국회의원, 고위 관료, 고위 법조인, 장성급 이상 군인과 경무관 이상의 경찰을 말한다. 위신 고위직은 소위 말하는 저명인사들인데 위엄과 신뢰로 먹고사는 대학교수, 언론인, 의료인이 포함된다.
―민주화는 성공했는데 그 이후 성공했다는 정권이 없다. 정치의 실패는 왜 반복되는가.
“더 이상 정치로 나라를 일으킬 수가 없다. 우리나라 정치도 포퓰리즘으로, 다른 나라보다 더한 포퓰리즘으로 흘러가고 있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은 표를 얻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국민도 등록금 반값으로 해주고 청년수당을 주겠다는 사람에게 표를 준다. 한국은 포퓰리즘에 저성장과 복지 확대가 결합하는 ‘치명적 3결합의 시대’에 있다. 헌법을 바꾸고 좋은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뽑으면 정치가 잘될 것이라는 기대는 오산이다. 앞으로 역사의 동력은 고위직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밖에 없다. 이들 고위직이 예전처럼 목숨을 걸고 모든 열정을 쏟아서 소명의식을 갖고 일하는 것 말고는 동력이 없다.”
―일류 대학 나오고 고시에 합격해서 고위직에 오른 사람들이 부패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내가 학교 다니던 1950년대는 절대 절망의 시대였다. 교수가 되기 전 기자 생활을 하던 1960년대 초 봄이면 보릿고개를 취재했다. 못 먹어서 얼굴이 누렇게 떠 죽어가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 속에서 1960년대, 70년대를 거쳐 80년대까지 정부에 들어왔던 고위직들은 국민이 안 굶어 죽는 나라를 만들어 보겠다는 확고한 국가관, 엄격한 기강, 자기가 맡은 일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면서 배가 부르게 되자 어떻게 하면 높은 자리에 올라가 볼까, 어떻게 하면 많이 벌까, 어떻게 하면 책임 안 지는 일을 해볼까만 궁리한다. 고위직이 거의 다 그렇게 돼 버렸다. 나라를 위한다는 생각, 공익에 열정을 다한다는 생각이 사라졌다. 이것이 사라지니까 부패가 오고 그 끝자리에 김영란법이 온 것이다.”
―우리 상층에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왜 없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내면화할 시간이 없었다. 내면화는 뼈와 살이 되는 것, 몸에 배는 것, 체질이 되는 것이다. 내면화돼 있으면 무의식중에 행동해도 과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서양의 상류층이 중시하는 게 절제(temperance)다. 우리는 그것이 안 된다. 할아버지와 그 윗대부터 여러 대에 걸쳐 내려온 상층을 누대(累代)상층이라고 해서 당대(當代)상층과 구별할 수 있다. 서구의 누대상층은 절제심에다 용기를 갖고 있다. 잘못된 것을 보면 참지 못하고, 그렇다고 함부로 나서지도 않는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핵심은 결국 ‘희생’이다. 희생의 내용은 첫째 목숨희생, 둘째 기득권희생, 셋째 타인에 대한 배려와 양보 헌신이다. 그러려면 문화와 윤리의 내면화, 즉 체질화가 필요하다. 그래서 가풍이 중요한 것이다. 당대상층을 졸부(猝富)라고 한다. 졸부의 졸자에는 개 견(犬)자가 붙어 있다. ‘갑자기 졸’자다. 논어에 졸부귀불상(猝富貴不祥)이라는 말이 있다. 갑자기 부유해지거나 갑가지 귀한 몸이 되면 상서롭지 못하다는 말이다. 우리는 졸부가 많다.”
SKY 나와야 성공한다는 건 착각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나
“중요한 것은 가풍. 영어로 family discipline이다. 아버지가 갑질하는 것만 본 자식은 갑질을 하게 돼 있다. 1980년대 초 미국에 1년간 방문교수로 갔다. 그때 우리 애들이 고등학교에 다녔다. 미국 학교는 어떻게 가르치는지 궁금해서 교사와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 교사는 가르치는 게 간단하다고 말하더라. 신상 카드가 있어 부모의 직업, 학력, 나이를 적는다. 우리는 그런 걸 기록을 못하게 하지만 그들은 아주 상세히 적는다. 신상 카드 밑에 절반은 가풍을 적는다. 애가 문제가 있으면 가풍을 보면 문제가 뭐고 어떻게 지도할 수 있는지 안다. 가족은 원초집단(primary group)이고 학교는 2차 집단(secondary group)일 뿐이다. 쇳덩이가 금덩이 될 수 없다. 자식은 부모 앞에서가 아니라 부모 뒤에서 큰다는 말이 있다. 나이 들어서 엄마 안 닮은 딸이 있는가 보라.”
―우리는 왜 가풍에 관심이 없나.
“부모들을 모아 놓고 가풍 강의를 20년 했다. 한 인간의 사회적 성공에 기여하는 세 가지 집단에 가족, 학교, 직장이 있다. 부모들에게 자녀를 성공시키는 데 가장 핵심적인 집단이 뭐냐고 물으면 학교라고 대답한다. 가족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왜 학교냐’고 물으면 우리 사회가 학벌 사회라서 그렇다고 대답한다. ‘우리가 왜 학벌 사회냐’고 물으면 우리는 스카이(SKY) 대학, 즉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를 나와야 성공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서울대를 나와서 성공했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몇 %나 될 것 같으냐고 물으면 적게 20%, 많이는 90%라는 답이 나온다. 그러나 사회적 성공을 사회에 대한 기여도와 사회로부터 받는 존경심으로 정의할 때 실제로 서울대 출신의 성공률은 2%도 안 되고 좀 더 느슨한 기준을 적용해도 5%밖에 안 된다. 나머지 95%는 지방대학, 심지어 고등학교 졸업자다. 내가 1950년대 후반에 서울대 정치학과를 다녔다. 당시는 정치의 시대라 정치학과가 법대나 상대보다 점수가 높았다. 뛰어난 인재가 모인 곳이 정치학과이고 동기 중에는 고건 전 총리, 아웅산 사태 때 사망한 서석준 전 장관 같은 이들도 있지만 동기 전체를 볼 때 성공한 사람은 15%에 불과하다.”
교육부가 없어져야 대학이 산다
―학교가 가풍을 바꿀 수도 있지 않은가.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가 있는 한 제대로 된 학교 교육이 이뤄질 수 없다. 미국에도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같은 명문대가 있고 잘하는데 우리나라는 왜 안 되는가 묻는다. 국가에서 교육에 관여하기 때문에 안 된다. 국가는 가능한 한 많은 규제를 만들어 공직자가 힘을 발휘하려고 하는 곳이다. 교육부부터 없애야 한다. 이웃 나라 일본도 문부과학성을 없애자는 얘기를 한다. 얼마 전 게이오대 총장를 만났더니 ‘당신들은 일본 것은 다 없애려고 하면서 일본식 교육은 왜 없애지 못하는가. 우리도 문부성을 없애려고 하는데 잘 안 된다. 한국부터 솔선수범해서 없애 보라’고 말하더라. 교육은 미국식으로, 유럽식으로 가야 한다. 학교에 맡기고 지역사회에 맡겨야 한다. 교육의 다원화 다양화 자율화가 일어나야 한다. 국가가 교육을 관장하면 절대 제대로 교육이 안 된다.”
―우리 대학의 문제는 무엇인가.
“과거 서울대에 문리대가 있을 때는 그래도 나았다. 문리대는 교양과목(Liberal Arts & Science)을 가르치는 곳이다. 하버드 등 세계 모든 명문대는 문리대가 있다. 서울대는 문리대 없애고 인문대 자연대 사회대로 쪼갰다. 왜 쪼개겠는가. 보직을 하나라도 더 만들려고 한 것이다.” 고위직 잘하면 북핵걱정 안해도 돼
―류성룡에 관한 책을 여러 권을 낸 이유는….
“내 전공이 정치사회학이고 리더십에 관심이 많았다. 조선에 리더십을 연구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보니까 조선에 인물이 정말 없더라. 겨우 셋이 있는데 첫째가 류성룡이고 다음에 송시열, 대원군 이하응이다. 송시열과 이하응은 부정적인 측면이 있는 리더십이고, 나라를 구한 리더십은 류성룡밖에 없다. 조정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순신을 육군에서 수군으로 바꿔 정육품에서 정삼품으로 일곱 계단 승진시킨 사람이 바로 류성룡이다. 짚 속에서 자다 치질에 걸려 온갖 고생하면서도 나랏일을 봤다. 명나라 장수에게 당한 수모도 나라를 위한다는 일념으로 참아냈다. 그가 없었다면 한강 이남은 일본 말 쓰고, 이북은 중국 말 쓰는 곳이 되고 조선은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북핵 위기를 임진왜란 위기에 비교하기도 한다.
“북핵에 대해 위기감을 갖는 것은 좋다. 그렇다고 북한이 제멋대로 핵을 쏠 수 있는 것처럼 여길 필요는 없다. 우리나라는 미국에서 핵 억지력을 제공받고 사드도 배치할 계획이다. 일본에는 X밴드 레이더가 있고 괌도 잘돼 있다. 북한은 이미 나라로서는 끝났다. 국가는 도덕공동체인데 도둑 강도를 막으라고 만들어 놓은 국가가 밀수 밀매를 하고, 마약을 재배하고, 위조지폐를 만들고, 외국인을 납치하고, 자기 국민을 노예로 만든다. 남아있는 것은 몸은 마비되고 숨만 할딱거리는 정권밖에 없다. 남한은 남한대로 2% 정도 성장을 계속해 가고 고위직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하면 절대 걱정할 것은 없다. 국민 의식이 다 바뀔 필요도 없다. 고위직만 제 할 일을 다 하면 된다.”
―‘헬조선’이란 말이 유행인데….
“지식인이나 언론의 생리가 비판적이다 보니 그런 얘기를 하지만 실제로는 지금처럼 살기 좋은 한국은 없다. 외국에서 보면 한국처럼 편리하며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나라가 별로 없다. 외국인들은 너희처럼 잘살면서 무슨 헬(지옥) 같은 소리 하느냐고 그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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