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는 17일 인천 남동구 남동공단의 한 중소기업을 방문했다.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의 회고록 파문이 불거진 뒤 나흘 만의 첫 공개 행보였다. 이 자리에서 그는 2007년 유엔 북한 인권결의안 표결 과정에 대해 “솔직히 (찬성했다는) 그 사실조차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핵심 당사자인 문 전 대표의 첫 언급에도 불구하고 파문은 더 복잡하게 흘러가는 양상이다. ○ ‘모호’→‘표결 찬성’→‘기억나지 않는다’
이번 파문이 불거진 직후인 14일 문 전 대표 측은 “(남북한) 여러 채널의 대화가 다양하게 이뤄지던 시점에서 논의된 것”이라고 해명했다. 핵심인 북한과의 사전 문의 여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이 “처음에는 문 전 대표가 찬성했다”며 송 전 장관의 주장을 반박했다. 이어 16일 문 전 대표의 최측근인 김경수 의원도 “문 전 대표가 초기에는 찬성했다”며 “(북측 의견을 물은 게 아니라) 기권 결정을 내린 뒤 북에 통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날 문 전 대표는 “저는 기권을 주장했을 것 같은데 다 그렇게 (찬성)했다고 한다. 모르겠다”고 했다. 기권 결정을 북에 전달했는지에 대한 질문에도 답하지 않았다. 이 전 장관 등의 증언을 토대로 송 전 장관의 주장을 반박하려던 문 전 대표 측 전략에 문 전 대표 본인이 제동을 건 모양새다. 다만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로 진실 공방 자체를 흐리는 효과를 거둔 셈이 됐다.
이에 대해 김 의원은 “문 전 대표는 (북 전달 여부 등) 전체적인 상황에 대해 기억하지 못한다”며 “당시 상황은 이 전 장관, 백종천 전 대통령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 등 당사자와 그 주변 사람들의 확인을 거쳤다”고 말했다. 문 전 대표 측 인사는 “문 전 대표의 기억이 명확하지 않다 보니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취합하느라 다소 혼선처럼 비치는 부분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반면 이 전 장관은 이날 “(회고록을) 믿지 않는다”며 “나도 메모가 있다”며 송 전 장관을 겨냥하고 나섰다. 당시 찬성(송 전 장관)과 반대(이 전 장관)를 각각 주장하며 격돌했던 두 사람 간 공방으로 끌고 가려는 의도로 비치는 대목이다.
또 다른 당사자인 백 전 실장은 “기억나지 않는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이에 대해 당시 외교라인 관계자는 “이 전 장관이 속한 자주파와 친하지만 군 출신인 백 전 실장은 송 전 장관의 주장을 반박할 수도 없어 ‘기억이 안 난다’로 일관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 11월 15일부터 18일까지 최소한 세 차례 이상 회의가 열렸는데 비서실장으로 핵심에 있었던 문 전 대표가 기억에 없다고 한 건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더민주당의 한 초선 의원은 “서별관 회의의 회의록도 없을 가능성이 크다”며 “설령 사실이 밝혀져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 문 전 대표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비판은 할 수 없게 된다”고 말했다. ○ ‘NLL 회의록 파문’의 학습효과?
이런 문 전 대표의 대응에 대해 당 안팎에서는 “‘서해 북방한계선(NLL) 회의록 논란’의 학습효과”라는 분석도 나온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새누리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NLL을 부정하는 발언을 했다”고 주장했다. 문 전 대표 측은 강하게 반박했고 공방이 회의록 확인으로까지 번졌지만 검찰 조사 결과 회의록 원본이 국가기록원에 이관되지 않은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문 전 대표는 “대화록 원본을 공개하자”며 강경 대응의 선봉에 섰지만 이번 파문의 진실 공방에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 비주류의 한 의원은 “강경 대응으로 나섰지만 의도치 않은 결과가 나왔던 NLL 논란처럼 공방의 극한까지 갈 필요가 없다고 본 것”이라며 “이번 파문을 ‘진실게임’으로 끌고 가기보다는 ‘여당의 철 지난 색깔론 공세’로 끌고 가려는 의도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NLL 논란과 달리 뚜렷한 물증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통일부와 국방부는 이날 “2007년 유엔 북한인권결의안과 관련해 남과 북이 판문점 연락사무소나 군통신선 등 대화채널로 전화통지문을 주고받은 기록이 없다”고 밝혔다. 송 전 장관이 회고록에서 국정원을 거론했음을 감안하면 공식적인 채널로는 기록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 대응책 없는 새누리당
문 전 대표는 이날 9년 전 논란은 피해가면서 “새누리당은 북한 덕분에 존속하는 정당”이라고 강력히 비판했다. “새누리당은 극심한 경제위기와 민생 파탄, 그리고 우병우(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와 (야당이 ‘비선 실세’라고 주장하는) 최순실 씨, 고 백남기 선생의 부검 문제 등을 덮기 위해 남북관계를 정쟁 속으로 또다시 끌어들이고 있다”고 성토했다. 문 전 대표가 ‘대선 정국의 전초전’ 같은 이번 국면에서 밀릴 수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새누리당 관계자는 “문 전 대표가 뭉개기 전략으로 가는 것 같다”며 “당시 회의자료 등이 대통령기록물로 보관돼 있는지, 설사 있다 해도 보존 기간 이전에 열람하려면 재적 의원 3분의 2 이상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데 야당이 동의할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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