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을 홍보하려면 프랑스에 한식 전문 교육기관을 세워야지, 왜 한국에 프랑스 요리학교를 세운데요?”
지난해 12월 초 파리 특파원으로 일할 때 잘 알고 지내던 한-프랑스 문화교류 기획사인 E사의 이모 대표가 화가 난 듯 전화를 걸어왔다. 당시 파리에서 열린 기후변화회의에 참석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방문을 앞두고 미르재단과 프랑스 요리학교 에콜 페랑디가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한-프랑스 문화교류에 대한 공로로 프랑스 정부로부터 훈장도 받았던 이 씨는 2013년부터 농수산식품유통공사(aT)가 진행해 온 에콜 페랑디 한식 홍보행사를 대행해왔다. 3년간의 노력 끝에 페랑디 학교 정규수업 시간에 한식조리 과정을 넣고, 우수한 프랑스 학생들을 한국으로 초청해 한식연수를 시키는 사업이 막 성사되기 직전이었다.
그런데 출범한 지 한 달도 안 된 미르재단이 갑자기 나타나 ‘한국의 집’에 에콜 페랑디 한국분교를 짓겠다는 MOU를 체결해버린 것이다. 이 씨는 당시의 심경을 프랑스의 교민신문 ‘한위클리’에 털어놓았다. 당시 페랑디 측은 “미르재단이 구체적인 사업계획도 없이 무조건 MOU에 사인만 해달라고 사정한다. 미르재단이 도대체 어떤 곳이냐”고 이 씨에게 물었다고 한다.
페랑디 측은 “우리는 국가 산하기관이라 정치적인 압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인을 했다”고 미안해했다고 한다. 결국 이 씨는 3년간 공들여 온 페랑디와 aT의 협력관계를 모두 포기해야 했다. 이 씨는 “상도의도 없는 사람들”이라며 허탈해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주 국무회의에서 ‘페랑디와의 MOU 체결’을 미르재단의 성과라고 치하했다. 그러나 미르재단이 중간에 끼어들면서 오히려 페랑디의 교육과정에 한식을 포함시키는 사업은 흐지부지돼 버렸다. 반면 페랑디는 설립 100년을 앞두고 첫 해외 분교 설립에 기뻐하고 있다. 한식을 홍보한다며 대기업 돈을 모은 재단이 결국은 프랑스 음식의 글로벌 진출만 도운 꼴이다.
‘창조경제’ ‘한류 확산’을 내건 미르재단, K스포츠재단의 사업이 대부분 이런 식이다. 최순실, 차은택 씨 등 권력을 등에 업은 비선 실세의 ‘갑질’은 염치도 눈치도 없었다. 한국스포츠개발원이 2년간 공들여 온 ‘코리아체조’가 한 달 만에 개발한 ‘늘품체조’로 뒤바뀌고, 밀라노 엑스포도 개막 5개월을 앞두고 갑자기 총감독이 교체됐다. K스포츠재단은 아예 최 씨가 딸의 승마 훈련을 위해 사유화하려 했다는 의혹이 일고 있다. 창조경제를 통해 미래를 위한 새로운 먹거리를 창조해 내기는커녕 남의 밥그릇 뺏기에 바빴던 것이다.
‘문화 융성’을 내건 현 정부의 문화정책도 마찬가지다. 1974년부터 40여 년간 연극 무용 문학 등 순수예술을 지원해 왔던 문화예술진흥기금이 2018년에 완전 고갈될 위기에 처했다. 반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융복합 콘텐츠’를 지원한다는 문화창조융합본부는 연간 1000억 원대의 예산을 지원받았다. 한 중견 뮤지컬 연극 연출가는 “가서 보면 공연 수준은 허접하기 그지없는데, 무대에 영상 틀고 ‘융복합’이란 제목만 달면 엄청난 지원을 받는다”고 개탄했다. 듣도 보도 못한 이들이 문화 권력으로 득세하는 사이, 문화체육계의 조직과 예산은 ‘차은택의 놀이터’ ‘최순실의 쌈짓돈’이 돼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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