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임기 내 개헌’을 발표한 다음 날인 25일 ‘비선(秘線) 실세’ 최순실(최서원으로 개명) 씨 관련 대통령 연설문 유출에 대해 대(對)국민 사과를 했다. 박 대통령은 ‘최순실 씨는 과거 제가 어려움을 겪을 때 도와준 인연’이라며 “일부 연설문이나 홍보물도 표현 등에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고 밝혔다. 박 대통령이 “취임 후 일정 기간 (최 씨의) 의견을 들은 적도 있으나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 그만뒀다”고 해명한 것은 비선이 실제 존재했고, 집권 이후에도 국정에 일부 관여했음을 사실상 시인한 것이다. 단 하루 사이에 나라를 뒤흔드는 충격적인 사건을 연달아 접한 국민은 황당하다 못해 허탈하고, 참담하다.
박 대통령이 ‘연설이나 홍보 등의 분야’ 정도에서 최 씨의 도움을 받았다는 95초의 사과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일이다. 24일 최 씨의 컴퓨터에 저장된 200여 건의 박 대통령 관련 자료 가운데 44건이 대통령의 연설문이나 국무회의·수석비서관회의의 ‘대통령 말씀자료’라는 보도가 나온 데 이어 25일에는 청와대 외교·안보·인사·경제 정책 자료까지 있다는 보도가 쏟아졌다. ‘정부조직개편안 평가’, ‘고용복지-업무보고-참고자료’, ‘가계부채―B’ ‘대통령 당선인 대변인 선임 관련’ ‘민정수석실 추천인 및 조직도’ 같은 인사 파일까지 있다니 이쯤 되면 최 씨가 박 대통령 뒤에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한 것이 아니냐는 분노가 치밀 정도다. 비밀리에 국정을 주무르는 ‘비선 실세’의 국정농단이라는 말은 이런 데 쓰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최 씨로부터 도움받은 것을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되기 전’까지라고 했으나 그렇지 않은 징후가 너무 많다. 최 씨의 컴퓨터에 담긴 대통령 관련 자료는 대선 때인 2012년 12월부터 2014년 3월까지이지만 최 씨가 최근까지도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두른 정황이 속속 드러난다. 김종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이 최 씨에게 인사 청탁을 했다는 정도는 차라리 가볍다. 한겨레신문은 어제 이성한 전 미르재단 사무총장을 인용해 청와대비서실 ‘문고리 3인방’ 가운데 한 사람인 정호성 제1부속비서관이 매일 밤 최 씨의 사무실에 30cm 두께의 ‘대통령 보고자료’를 들고 왔으며, ‘문화계 황태자’인 차은택과 최 씨 측근 고영태 등이 참석해 국가 정책을 논했다고 보도했다. 이 전 총장은 “이 모임에서 인사 문제가 논의됐는데 장관을 만들고, 안 만들고가 결정됐다”며 심지어 ‘개성공단 폐쇄’ 같은 정부 정책까지 논의했다고 전했다. 개성공단 폐쇄는 북한의 4차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도발에 맞서 올해 2월 10일 내린 조치다. 이 전 총장의 말이 맞다면, 공적 직함도 없고 전문가도 아닌 사인(私人)이 국가 안위를 뒤흔들 수도 있는 남북문제를 무슨 자격으로 결정했단 말인가.
지난해 ‘정윤회 문건 유출 사건’으로 구속된 박관천 전 경정은 검찰 수사 과정에서 “우리나라 권력 서열은 최순실 씨가 1위, 정윤회 씨가 2위이며, 박근혜 대통령은 3위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당시엔 근거 없는 소리로 치부됐지만, 그냥 넘길 수 없는 말이 됐다.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지고 기업들이 800억 원 가까운 돈을 바친 미르·K스포츠재단 관련 의혹도 결국 박 대통령의 비호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은 “비상시국에 난무하는 비방과 확인되지 않은 폭로성 발언”이라며 깔아뭉개려 들었다. ‘신뢰와 원칙’의 정치를 자부했던 대통령이 국민을 속인 것이다.
박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는 이원종 대통령비서실장의 표현대로 ‘봉건시대에도 있을 수 없는 얘기’가 사실임을 인정한 것이지만 국민의 분노를 가라앉히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 대통령이 공사(公私)를 구분 못 하고, 법치(法治)가 아니라 봉건시대에나 가능한 인치(人治)를 해 왔다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이러니 박 대통령에게는 장관들의 ‘대면 보고’가 필요 없었던 모양이다. 박 대통령은 ‘정윤회 문건 유출 사건’과 이석수 전 특별감찰관의 수사 내용 유출 의혹을 “국기(國基) 문란 행위”라고 질타한 바 있다. 국가원수인 대통령의 말씀자료 및 국가 기밀자료를 외부로 유출해 비선 실세가 주물럭거렸다는 것은 국기 문란보다 더한 헌정 문란 사태다.
어제 포털사이트의 검색어에 ‘박근혜 탄핵’과 ‘하야(下野)’가 수위에 오를 정도로 국민의 충격은 크다. 박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 땅에 떨어졌다. 앞으로 박 대통령의 ‘권위’가 유지될 수 있을지, 대통령이 강조해 온 4대 개혁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아직 대통령 임기는 1년 4개월이나 남았다. 과연 박 대통령이 경제·안보 위기보다 더한 초유의 위기를 어떻게 수습할지 국민이 대통령을, 나라를 걱정해야 할 판이다. 최 씨의 국정농단 사건으로 국가의 백년대계를 설계할 개헌론도 하루아침에 동력을 잃게 될까 봐 개탄스럽다. 역설적으로 제왕적 대통령의 실정(失政)으로 국가가 한순간에 마비 상태에 빠질 수 있는 5년 단임제를 고쳐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안보·경제 위기에 국기마저 무너져 내린 사실상의 국가 비상사태다. 박 대통령은 특검이든 국정조사든 전적으로 수용해 철저한 진상 규명을 통해 진실을 국민 앞에 밝히고 필요하다면 조사도 받아야 한다. 이원종 비서실장은 국정감사에서 대통령 연설문 유출을 전면 부인했다. 청와대의 보안·감찰을 총괄하는 우병우 민정수석비서관은 직무유기를 저질렀다. 이 실장과 우병우·안종범 수석을 비롯한 청와대 비서진은 총사퇴해야 마땅하다. 새누리당도 정신 차려야 한다. 이제는 국민이 마음을 굳게 먹고 나라를 지켜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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