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은 25일 대국민 사과에서 최순실(최서원으로 개명) 씨에게 연설문을 사전에 전달했다는 점은 시인했지만 과정은 공개하지 않았다. 최 씨의 태블릿PC에서는 인사, 외교 등 국정 관련 문서들도 상당수 발견됐다. 청와대에서 누군가가 지속적으로 최 씨와 접촉하면서 자료를 보내줬다는 얘기다.
최 씨의 태블릿PC 소유주는 ‘마레이컴퍼니’라는 법인 명의였고, 이 법인 대표가 김한수 청와대 뉴미디어실 행정관으로 확인됐다고 jtbc가 26일 보도했다. 최 씨가 김 행정관이 개통한 태블릿PC를 통해 청와대 문서를 받아왔다는 것이다.
김 행정관은 2012년 대선 때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선거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시절에는 SNS 팀장을 맡기도 했다. 박 대통령이 2013년 취임한 뒤 행정관으로 임명돼 뉴미디어실에서 현재까지 근무하고 있다. jtbc에 따르면 최 씨 태블릿PC에 깔려있는 카카오톡의 친구 명단에는 김 행정관이 ‘한 팀장’이라는 애칭으로 저장돼 있었다. 최 씨가 김 행정관에게 ‘하이(Hi)’라고 격의 없이 인사할 만큼 두 사람이 친밀한 사이로 추정된다고 jtbc는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김 행정관과 통화를 시도했으나 연결이 되지 않았다.
최 씨에게 대통령 연설문 등을 전달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 사람은 정호성 대통령부속비서관이다. 정 비서관은 26일 새벽 귀갓길에 동아일보 기자를 만나 “매일 자정에나 퇴근하는데 언제 (최 씨에게) 가서 (문건을) 전달하느냐. e메일로도 전한 바 없다”고 관련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그러나 이날 jtbc는 최 씨 태블릿PC에 들어있는 ‘국무회의 말씀자료’ 등 문서 파일 여러 건의 작성자 ID(‘narelo’)가 정 비서관의 것이라고 보도했다. PC에는 또 다른 ID가 등장하는데, 이 ID의 주인이 만든 문서를 정 비서관이 손을 봐서 최 씨에게 넘어간 유통 경로도 확인됐다는 것이다. ‘greatpark1819’라는 ID의 정체도 관심을 끈다. 이메일에 암호가 걸려 있고 해당 계정이 폐쇄돼 내용 확인이 어렵지만 일각에선 박 대통령 관련 ID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인사 검증과 내부 감찰 업무 등을 담당하는 민정수석비서관실에도 전직 공무원 출신 C 행정관과 D 행정관 등이 ‘최순실 라인’이라는 말도 나온다.
박 대통령이 청와대에서도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하면서 이른바 ‘문고리 3인방(이재만 안봉근 정호성 비서관)뿐 아니라 박 대통령을 그림자처럼 수행하는 윤전추 행정관이 ‘핵심 실세’라는 얘기도 있다. 서울 강남에 있는 최 씨의 비밀 의상 제작실에서 박 대통령의 의상을 챙겨오기도 한 윤 행정관을 최 씨가 추천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이와 관련해 박 대통령 집권 44개월간 청와대의 보고 및 의사결정 시스템이 고장 났다는 지적이 나온다. 청와대 사정에 밝은 이들은 권력 운용의 핵심인 ‘견제와 균형 원칙’이 무너진 점을 근본 원인으로 꼽는다. 박 대통령은 특별한 일정이 없으면 본관 집무실로 출근하지 않고 관저에 머물 때가 많다고 한다. 이 때문에 문고리 3인방 등 소수 인원만 박 대통령을 대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전직 고위 관료는 “장관들이 처음에 정 비서관에게 박 대통령 대면보고 시간을 잡아 달라고 요청하다가 몇 차례 정 비서관에게서 ‘그냥 보고서를 올리라고 합니다’라는 얘기를 들으면 그 다음부터 대면보고를 요청할 수 없게 된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주로 전화로 지시를 내리는 스타일이다.
‘정윤회 동향 보고’의 작성자인 공직기강비서관실의 박관천 전 행정관은 2014년 상반기 동아일보 기자와 만나 이렇게 말했다. “문고리 3인방은 박 대통령의 피부다. 옷(다른 참모진을 의미)은 벗어버리면 되지만 피부가 상하면 수술을 해야 한다. 몸(박 대통령)이 다친다.”
현 청와대에선 연설기록비서관조차 박 대통령을 대면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고 한다. 이런 의사결정 과정에서 최 씨가 광범위하게 국정에 개입할 공간이 만들어졌다는 관측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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