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원홍]구한말 무당의 국정 농단과 오늘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1월 1일 03시 00분


이원홍 스포츠부 차장
이원홍 스포츠부 차장
 구한말 고종과 명성황후를 조종했던 무당 진령군(眞靈君)이 있었다.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며 당시의 세태를 기록하다 끝내 나라가 망하자 자살했던, 학자이자 우국지사 황현(1855∼1910)이 지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등장하는 기록이다.

 “무당은 아무 때나 대궐에 나아가 임금(고종)과 중전(명성황후)을 뵈었으며… 금은보화를 상으로 주니 이루 셀 수 없이 많았다. 화와 복이 그의 말 한마디에 달렸으니, 수령 방백들이 자주 그의 손에서 나왔다. 이에 부끄러운 줄 모르는 대신들이 앞다투어 그에게 아부하니, 혹은 자매라 부르기도 했고 혹은 수양아들이 되기를 원하기도 했다.”(‘매천야록’·허경진 옮김·서해문집)

 이 무당은 1882년 구식 군대의 군인들이 신식 군대와의 차별대우에 반발해 일으킨 임오군란을 배경으로 등장한다. 중전이 충주로 피란 가 있을 때 이 무당이 찾아가 환궁할 때를 점쳐 주었는데 들어맞자 신기하게 여겨 궁으로 데리고 갔다는 것이다. 이후 중전의 몸이 좋지 않을 때면 무당을 찾았고 날마다 총애가 더해지니 무당의 말이라면 들어주지 않는 것이 없다고 했다. 마침내 무당이 “나는 관성제군(關聖帝君·삼국지 속 관우를 신격화한 존재)의 딸이니 신당을 지어 정성껏 받들라”고 말하니 중전이 그 말대로 따랐다고 한다.

 이런 진령군에게 접근한 사람 중에 이유인이라는 이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진령군에게 자신이 귀신을 불러낼 수 있다며 산으로 데리고 갔다. 한밤중 산속에 미리 짜고 귀신 가면을 쓴 불량배들을 배치한 뒤 자신이 귀신을 부르면 나타나게 했다. 이에 속은 진령군은 이유인을 고종과 중전에게 아뢰었고 이유인은 벼슬을 얻었다고 한다.

 이 기록은 사실이었을까. 지방에 은거하던 황현이 직접 보고 확인한 내용은 아니다. 하지만 황현이 이 이야기를 기록해 두었으니 당시에 이런 내용이 세간에 돌았던 것만은 분명한 듯하다. 진령군은 최근 사람들 사이에 다시 오르내리고 있다.

 한국의 ‘최순실 사태’를 보도하는 해외 언론에도 주술적인 표현이 등장했다. 미국의 유력지 뉴욕타임스는 대통령에게 은밀한 조언을 한 인물(shadowy adviser)이 야당으로부터 ‘무당 점쟁이(Shaman Fortuneteller)’로 비난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제정 러시아의 몰락을 부채질한 요승 라스푸틴을 거론한 해외 언론들도 있었다.

 진령군이든 라스푸틴이든 정권의 은밀한 장막에 숨어 있다 드러났으며 그 존재가 드러났을 때는 이미 그 정권의 위기가 절정에 달했을 때였다.

 주술적 표현과 요승의 이야기가 돌아다니고 있는 것은 최근의 사태가 너무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차라리 기이한 힘이 작동해서 생겨난 결과라고 믿고 싶어 나타난 현상은 아닐까.

 그러나 최 씨가 문화체육관광부와 각종 관계 기관에 영향을 끼친 힘의 속성이 주술적인 것일 리가 없다. 그것은 권력의 칼날을 언뜻언뜻 보여주며 행사한 매우 물리적인 폭력에 가깝다.

 이런 권력의 힘 앞에서 정부 관료들은 굴종했다. 100여 년 전 매천야록 속 대신들의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다. 원칙을 지켜야 할 관료들이 권력 앞의 굴종을 자신의 안일과 출세를 위한 처세술쯤으로 여길 때 민초들을 짓누른 삶의 하중은 가중돼 왔다.

 최 씨가 ‘공정성’을 상징으로 하는 스포츠 쪽에서 농단한 것은 역설적이다. 문체부는 스포츠 분야야말로 사회의 공정한 경쟁을 상징하는 영역이라는 인식 아래 스포츠 비리를 없애고자 한다고 천명했다. 그러나 이제는 현 정권 들어서 유달리 많이 시도했던 그 수많은 체육단체에 대한 감사와 조사마저도 그 저의를 의심받고 있다.

 믿음이 사라지고 남은 의심과 분노가 쌓여 절망을 이룬다. 국민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은 분노와 절망의 굿판을 걷어치우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이원홍 스포츠부 차장 bluesky@donga.com
#고종#명성황후#무당#황현#매천야록#최순실#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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