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깨끗하고 투명하고 유능한 정부를 반드시 만들어 국민 여러분의 신뢰를 얻겠습니다.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씻어내고 신뢰의 자본을 쌓겠습니다.”
2013년 2월 25일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제18대 대통령 취임식. 박근혜 대통령은 투명한 정부와 국민의 신뢰를 강조했다. 그러나 3년 8개월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은 신뢰의 위기에 빠져 있다.
취임 이후 박 대통령은 여러 차례 위기를 겪었다. 세월호 참사,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파동, 4·13총선에서 여당 참패, 북한의 4·5차 핵실험, 경제위기 등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박 대통령의 원칙을 믿었다. “비선의 개입을 막기 위해 친동생들과의 왕래마저 끊었다”는 박 대통령의 노력을 믿었다. 그러나 ‘최순실 사태’를 통해 그 믿음이 깨졌다.
최순실 씨가 어디까지 개입했는지 아직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박 대통령 행적 중 의문스러운 것이 있었는데, 지금 보니 최 씨 때문 아니냐”는 식의 의혹이 끊이지 않는다. 역대 정부에서 많은 비선이 등장했지만 ‘수렴청정(垂簾聽政·어린 왕이 즉위했을 때 성인이 될 일정 기간 동안 왕대비나 대왕대비가 국정을 대리로 처리하던 일)’ 의혹까지 제기되는 상황은 그동안 없었던 것 같다. 그동안 박 대통령을 지지했던 국민은 배신감 때문에 허탈해하고, 박 대통령을 비판했던 사람들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며 쓴웃음을 짓고 있다.
청와대 참모들도 시쳇말로 ‘멘붕(멘털 붕괴)’ 상태다. 박 대통령과 최 씨의 관계에 대한 이런저런 의혹이 처음 제기됐을 때 참모 대부분은 “말이 되는 소리냐”고 강하게 반박했다. 그런 의혹 가운데 상당수가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이제는 ‘설마’라는 말도 함부로 하기 어렵게 됐다”는 자조 섞인 목소리마저 나온다.
민주적 통치의 근간을 흔들리게 하고 국민에게 상처를 준 박 대통령은 비판을 피할 수 없다고 본다. 그렇지만 그런 비판에 모든 국력을 쏟아 부을 수는 없다. 누군가는 ‘대한민국호’를 끌고 나가야 한다. 대통령과 청와대가 사실상 무너졌고, 정부도 흔들리고 있는 지금 그 역할은 국회가 맡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여의도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국민의 마음을 더욱 씁쓸하게 만든다. 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계기로 내년 대선이나 당내 입지를 강화하는 데 활용하겠다는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
거국중립내각을 논의하기 위해 국회의장과 3당 원내대표가 모인 자리는 제대로 이야기도 꺼내 보지 못한 채 5분 만에 끝났다. 더불어민주당은 ‘최순실 사태’가 커지자 처음에는 거국중립내각을 요구하더니 “이제 와서 그런 오물 같은 데다 집을 짓겠다는 것인가”라며 돌연 반대하고 나섰다. 청와대·정부와 함께 국정 운영을 책임져야 하는 여당은 당권을 놓고 친박(친박근혜)-비박(비박근혜) 계파 간 내홍이 다시 시작되는 양상이다.
위기를 앞세워 ‘무조건 단합’을 주문할 생각은 없지만 실제로 안보·경제 위기는 심각해 보인다. 국민은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런 위험을 묵묵히 견디며 살아가고 있다. 정치인들이 대안을 찾는 데 집중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야당으로선 차기 대선 전략 차원에서 여권이 만든 ‘오물’에 발을 담그지 않는 게 맞을지 모른다. 하지만 국민을 생각한다면 좀 더 책임감 있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여당은 민생을 최우선으로 삼기 위해 당권 문제나 대선 걱정은 조금 뒤로 미뤄야 한다.
의원들은 불과 7개월 전 국민들이 왜 자신에게 표를 줬는지 한번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그러면 지금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스스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판단조차 하지 못하는 정치인들은 국민의 매서운 회초리를 피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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